연극 ‘야키니쿠 드래곤’. 일본 신국립극장 제공.
한-일 합동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 일본을 울리다
지난 17일 일본 도쿄의 중심지 신주쿠 신국립극장 무대에 한편의 의미있는 연극이 막을 올렸다. 한국 예술의전당 20주년과 일본 신국립극장 10주년을 기념해 한-일 합동으로 만든 <야키니쿠 드래곤>이다. 일본 연극계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손꼽히는 재일동포 3세 정의신(51)씨가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재일 한국인들의 힘겨운 삶과 애환을 섬세하게 담아내 한국의 젊은 연출가 양정웅(40)씨와 공동 연출로 첫선을 보였다.
중학교에서 이지메(집단괴롭힘)를 견디지 못한 토키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집을 강제철거 당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아버지 용길이 일본강점기 때 전쟁에 끌려가 왼팔을 잃어버린 텅빈 옷소매를 부여잡고 “나한테 이것도 저것도 다 빼앗을 참이냐. 억지로 전쟁에 끌고 갔지 않았냐. 땅을 빼앗을꺼면 이 팔을 돌려줘, 내 팔을 돌려줘. 그리고 내 아들 돌려줘, 지금 당장 돌려줘”라고 울부짖자 객석에서 억눌린 오열이 새어나왔다. 공연이 끝나자 재일동포로 보이는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무사히 첫 공연을 마쳐서 너무 기쁩니다.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들의 힘겨운 삶과 고민을 관객들에게 스트레이트로(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자이니치들에 대해 여러 작품을 썼지만 이번 만큼 구체적이진 않았어요.”
공연이 끝난 뒤 정의신씨는 “주연 배우 신철진과 고수희씨 등 한국 배우들이 내가 의도했던 것을 무대 위에서 훌륭하게 잘 표현해줘서 너무 고마왔다”고 밝게 웃었다.
이 연극은 일본의 고도성장기로 불리는 1969년 간사이 지방의 변두리 철로변 조선인 빈민촌에서 작품 이름 그대로 용길네 곱창구이집 ‘야키니쿠 드래곤’을 꾸려나가며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 가족의 삶과 애환을 4계절의 흐름과 함께 펼쳐낸다.
주인공 김용길(56)은 태평양 전쟁에서 왼쪽 팔을 잃고 한국전쟁에서는 아내마저 잃었다. 고향 제주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4.3사건’으로 부모 형제를 비롯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포기한다. 동향인 제주 출신 영순(42)과 만나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과 영순이 데려온 셋째딸, 영순과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 아들 등 4남매를 키우며 재일동포의 고된 삶을 견뎌내고 있다. 그러나 사고로 다리를 저는 큰딸 후유코(정화·35) 내외가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북한으로 떠나고, 둘째딸 아키코(이화·33)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한다. 셋째딸 미카(미화·24)는 일본 유부남과 눈이 맞아 임신을 해버리고, 막내 아들 토키오(시생·15)는 일본학교에서 집단괴롭힘을 못 이겨 지붕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다. 용길은 모두가 “자신의 운명이고 팔자”라고 받아들였지만, 일본인에게 정당하게 구입한 음식점마저 국유지 불법 점거로 강제 철거를 당해 삶의 터전이 뿌리뽑히면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이 작품에는 결함 있고 그 탓으로 상처를 받은 존재들을 진솔하면서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애정이 짙게 배어 있다. 그 존재들과 그들의 삶에는 전후 오갈 데 없는 재일동포들과 가난한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오사카 인근의 효고현 히메지의 빈민가에서 자란 작가 자신의 뼈저린 경험이 녹아 있다. 그는 15살 때 혈혈단신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온 충남 논산 출신 아버지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2세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났다. 전후 고철 등 폐품을 수집해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갔던 부모가 너무 바쁜 탓에 그를 비롯한 다섯 형제는 외할머니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자이니치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한일 합작인데다 일본과 한국에서 공연된다는 것도 있지만 일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닌 자이니치의 존재에 두 나라가 좀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의도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공연을 지켜본 연출가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와 배우 김성녀씨는 “정말 좋은 작품이었고 한국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 정의신씨가 그동안 재일동포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어 전설> <그 다음의 여름>)을 발표해왔지만 이번처럼 ‘직선적으로’ 재일동포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의신씨는 비단 재일동포뿐만 아니라 장애인, 동성애자 등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밑바닥 인생-그는 이들을 ‘마이너리티’라고 부른다-을 다루는 문제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유독 마이너리티에 집착하는 까닭이 궁금했다.
“저 자신도 자이니치로써 어떻게 보면 일본 사회에서 가장 소수자이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제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 자신도 처음에는 이런 마이너리티와 그들을 차별하는 일본 사회가 싫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상처받은 사람들이 좋아지게 되는 과정을 겪었고, 그래서 더 마이너리티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라고 특정지울 수 없지만 작가로서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의 문제는 앞으로도 더 다루고 싶습니다.”
그는 “앞으로 십년, 이십년이 지나면 자이니치라고 불리는 존재가 과연 일본 사회에서 남아있을지 의문이 많기 때문에 재일동포에 관한 것을 계속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자이니치를 포함해 마이너리티의 삶이 무대 위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오늘 연극을 보면서 각각의 극중 인물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인생이 겹쳐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일본 연극전문 잡지 계간 <대사의 시대> 편집장 오쿠야마 도미에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일본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 정의신씨의 언어를 한국 배우들이 몸으로 습득해 몇 배로 표현해 놓은 것이 놀라왔다. 일본 내에서도 마이너리티(소수자)를 다룬 작가가 더러 있지만 정의신씨가 가장 신뢰를 받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또 2006년 12월 한국에서도 공연됐던 정의신씨의 작품 <행인두부의 마음>의 주연 여배우였던 가하시 가코는 “정의신씨가 살아오면서 겪어온 어려움을, 그가 정말 쓰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정과 사랑이 넘치고 해피엔딩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뿔뿔히 흩어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에 굉장이 감동을 받았다. 한국과 일본이 재일동포들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볼 것인가를 말해준 작품”이라고 말했다.
도시샤대학 문학부를 중퇴한 정의신씨는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가 세운 요코하마방송영화전문학교(현 일본영화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한 뒤 영화사 쇼치쿠에서 영화미술 조수로 첫발을 내디뎠다. 또한 일본의 실험극단 ‘블랙텐트’ 참여를 계기로 연극계에 입문한 뒤 재일동포 연출가 김수진씨, 배우 김구미자씨 등과 함께 극단 신주쿠양산박을 결성해 작가겸 연출가로 활동하면서 연극 <천년의 고독> <더 데라야마> <지에스지카마쓰 상점> 등 화제작들을 발표해왔다. 또한 1996년 신주쿠양산박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연극 <행인두부의 마음> <겨울 해바라기> 등과 영화 <사랑을 구걸하는 사람> <달은 어느 쪽으로 뜨지?> <기시와다 소년 바보연대> <피와 뼈> 등의 시나리오와 드라마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난 내일로 18세가 된다> 등 작품을 끊임없이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테아토르상, 기시다 구니오 희곡상, 마이니치영화콩쿨 각본상, 기네마순보 각본상, 일본아카데미상 등 영화와 연극, 방송 등 각 분야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12월에는 그의 희곡집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그는 현재 규슈 지방의 탄광에서 일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공포영화를 준비하고 있고, 또 아줌마 합창단의 얘기를 다룬 홋카이도 텔레비전 드라마와 전쟁 중 포로를 죽게 한 병사의 이야기를 담은 일본방송협회(NHK) 텔레비전 드라마를 쓰고 있다.
한편 2002년 한국과 일본에서 공연한 <강 건너 저편에>에 이어 예술의전당과 신국립극장이 두번째로 시도하는 한일공동 프로젝트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은 27일까지 일본 신국립극장에서 간사이 지방 사투리어와 한국어 대사로 공연된 뒤 다음달 20~25일 한국 예술의전당 토월극장(02-580-1300)에서 국내 관객과 만난다. 신철진, 고수희, 박수영, 김문식, 주인영, 치바 테츠야, 와타 우라라, 우라베 후사코, 미즈노 아야, 와카마츠 치카라, 주겐지츠, 쇼후쿠테이 긴뻬이, 박승철, 야마다 타카유키 등 한국과 일본의 뛰어난 배우들이 공동 출연한다.
도쿄/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 일본 신국립극장 제공.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 일본 신국립극장 제공.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 일본 신국립극장 제공.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 일본 신국립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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