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특급호텔’
[리뷰] 연극 ‘특급호텔’
너무 쉽게 그리고 자주, 여자의 몸이 세상에 내팽개쳐진다. 인격이 거세당한 채로 말이다. 가깝게는 어두운 골목길이나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서 성추행범의 사냥감이 되고, 멀게는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가 존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래밭에 얼굴을 파묻은 타조처럼 무심하다. 참상은 언제나 피해자의 것이며, 상처받은 격앙된 목소리에 평화로운 일상이 공격당하는 것이 싫기만 하다.
서울연극제 참가작인 극단 초인의 <특급호텔>은 그래서 의미 있는 시도다. 타조의 궁둥짝을 후려치면서 모래밭에서 얼굴을 들고 참상과 대면할 것을 권유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라본 뮐러가 쓰고 박정의가 연출한 <특급호텔>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식민지 한국 여성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한국의 역사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외국 작가가 우리의 치부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일견 자존심이 센 관객은 불편함을 느낄 법도 하다. 게다가 완벽하게 정선되지 않은 번역 투의 대사는 공연 도중 관객을 어색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실, 그리고 파괴된 인간의 존엄함에 대해 고민하는 연극은 때로 얼마나 강도 높은 힘을 발휘하는가. <특급호텔>은 직면하기 고통스러운 공연이었지만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감동을 주었고, 격앙된 외침이나 감상주의로 빠져들지 않는 형식미와 시적 거리감을 유지하였다.
작품은 청각에 호소하는 들려주기 방식으로 미학적 거리감을 확보한다. 작가는 위안부 4명과 일본군을 대변하는 남자 1명만으로 최소의 인물 배치를 한 뒤, 독백에 가까운 시적 대사나 자매애를 보여주는 수다로 위안부의 고통을 표현하였다. 덕분에 무대 위의 상황은 지속적 흐름을 갖기보다는 분절되었고 청각을 통해 뇌에 도달하는 우회적인 경로나 시적인 언어로 즉물적 끔찍함보다는 고통의 본질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였다.
극단 초인은 그동안 신체 움직임을 강조하는 연극에 주력하더니 <특급호텔>에 와서 대사 중심의 연극에도 역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실 그 역량은 오랜 숙성기간을 견딘 정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을 보니 이 공연은 짧은 연습을 당연하게 여기는 최근 연극계의 풍토와 달리 몇 개월에 걸친 강도 높은 연습을 감행한 눈치다.
그 숙성 과정 속에서 작품은 상투적인 감상주의로 빠져드는 대신 비범한 절제력을 확보하였고, 높이가 다른 평상들로 설치된 역동적이면서도 간결한 무대나 고립감을 강조하는 조명 운용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위안부들의 특급호텔을 군더더기 없이 효과적으로 묘사하였다. 서울연극제의 행진은 5월25일까지 계속 이어진다.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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