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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리뷰] 삶과 죽음 엇갈린 장기판 위 인생

등록 2008-05-15 19:58

연극 ‘체크메이트’
김재엽의 연극은 장난기 많고 냉소적이지만 순정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기와 대중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복잡하다. 이런 모순은 기질적이면서 동시에 그가 자기 세대의 정체성과 씨름하느라 생겨난 겹들이다. 진보의 비전은 상실했으나 순정은 버리지 못했고, 현재와 감각적 경쾌함은 공유하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한 엑스(X)세대의 혼란.

그래서 어느 날 문득 헌책방에 들어가 과거의 책을 뒤적거리며 순정을 기억하고(<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베케트와 셰익스피어를 현란하게 뒤섞으며 유령을 기다리는 햄릿을 명분에 매인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유령을 기다리며>).

혜화동 동인 4기 페스티벌 참가작으로 이번에 재공연 되는 <체크메이트> 역시 이런 경향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죽음을 앞둔 한 극작가가 역시 죽음을 앞둔 왕에 대한 이야기를 써간다는 설정인데, 체스 용어로 패배(죽음)를 상징하는 ‘체크메이트’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삶과 그 대척점에 있는 죽음과 허구의 관계를 그려 나간 작품이다. 아직 설익은 초기작이지만, 삶과 죽음의 교직과 그것이 허구적 창작물 속에 녹아드는 과정을 장기판의 말 넘나들듯 산뜻하게 그려내는 형식미나 객관적 현실을 거부하는 플라톤적 세계관이 인상적이다.

특히 공간 사용이 활력적이다. 사실 혜화동일번지소극장은 지나치게 협소해서 삶과 죽음 또 허구라는 상이한 층위를 공간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어려웠을 텐데, 김재엽은 다양한 등·퇴장로와 상징적 분할로 공간을 경제적으로 확장하고 주제를 시각화해냈다. 가령 체스게임을 공간의 콘셉트로 잡아 시작도 끝도 없는 흑백의 체크무늬로 바닥과 무대를 채운 뒤 검은 무대를 점차 확장시켜 나가며 ‘체크메이트’를 시각화하는 재치, 또 달랑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책상만으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솜씨가 빼어나다.

반면 배우들의 연기는 너무 같은 층위에서 작동되지 않았나. 시끌벅적한 활력은 있으나 현실과 허구를 나눌 만한 연기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그런데 ‘체크메이트’라니. 이제 출발점에 서 있는 그의 세계관이 시작부터 패배적인 것은 아닌가. 농담처럼 가볍고 즐거운 그의 작품들 저변에 반복적으로 깃들어 있는 적당한 체념과 패배를 확인하는 것은 가슴 서늘한 일이다. 노파심에서 그에게 이런 진부한 말을 해도 될까. 세상의 모든 씨앗은 어둠 속에서 기다린다. 빨리 내린 결론을 넘어 한 걸음만 더 가시길. <체크메이트>는 18일까지, 혜화동일번지페스티벌은 6월15일까지.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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