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과 선으로 된 이상남의 그림은 기계제품 설명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분해한 부품을 최대한 원 구조물에 가까운 구도로 그려 결합관계를 알 수 있게 만들었다. 구조에 대한 천착은 최근 들어 ( ){ } ∽ ÷ 등 수학기호를 이용한 연산식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전자가 기계적이라면 후자는 논리적인 것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오토매틱04> .
이상남 개인전 ‘풍경의 알고리듬’
뉴욕에서 처절하게 다시 닦은 자신의 거울
버리고 버렸다는데 흔적같은 단청…징소리…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로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윤동주 <참회록> 중) 1981년, 생면부지의 뉴욕으로 간 스물여덟 이상남은 스스로 절벽 위에 섰다. 당시 그곳은 안젤름 키퍼 등 독일 표현주의와 줄리언 슈나벨, 로버트 롱고 등 새로운 구상이 주류였다.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공포. 3년, 3개월 또는 3일마다 물갈이가 된다는 뉴욕 미술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 버려야 했다. 서양계보를 좇느니 나의 신화를 만들자며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참회록> 중) 회화란 무엇인가, 근원적인 물음에서 시작한 7, 8년 동안의 시행착오는 거울 닦기와 같은 것. 그런 끝에 이른 세계가 이미지의 원점인 원과 선분이었다. 뉴욕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안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고 문명화한 이미지의 범람이 근본으로 회귀하게 만든 것이다. 현재 이상남의 회화작업은 뉴욕의 옛 신화를 되풀이한다. 단일색 바탕에 원과 선분의 조합으로 된 이미지를 올리고 덧칠을 한 다음 손바닥 발바닥으로 갈아내 묻힌 이미지를 드러내는 식의 절차가 그것.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참회록> 중) 원과 선분은 이미지의 끝이자 출발점. 점이 쌓이면 선분, 선분이 쌓이면 면, 면이 쌓이고 회전하면 입체가 되기 때문. 이상남의 작업이 자연 또는 문명의 이미지와 다른 것은 원과 선분을 쌓되 이미 존재하는, 혹은 익숙한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인공적인 그의 작업은 외계문자, 미래 이미지로 보인다.
비밀은, 작가가 보유한 원-선분 조합으로 된 200여개의 아이콘. 오랫동안 작업노트를 쓰면서 마련한 이 아이콘들을 또다시 무작위로 조합해 존재하지 않았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기하학 원리를 처음 만났을, 10대 초반 무렵의 경이로운 감수성의 회복. 거기에다 선의 굵기와 형태의 차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는, 고교 때 배운 설계도의 실용성이 합쳐졌기 때문. 그런 다음이면 무한한 놀이공간이 펼쳐지지 않겠는가. 작품에는 제자리에서 맴돌며 환각을 즐기는 어린 아이, 또는 링과 공을 던지며 노는 피에로 같은, 평면에서 기하놀이를 하면서 환각을 즐기는 작가의 뒷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관객이 작품 앞에 오래 머무는 것은 작가의 자리에 자신을 대체해 같은 체험을 즐기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 출신의 작가는 깍쟁이 아니랄까, 무척이나 깔끔을 떤다. 칠하고 갈아내어 빚어낸 맨질맨질한 표면은 물감의 흘러내림 또는 요철로 인한 빛의 산란 등 기하 외적인 울림을 배제한다. 또 반복 노동으로 색감에 배어든 작가의 거친 숨소리와 칼로 잘라낸 듯 정확한 도형들이 빚어낸 대조는 까칠할 정도로 극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이미 익숙한 흑백, 또는 원색 계열의 색을 구사하는 것도 군더더기 정서를 없애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그의 무국적 그림에서 출신국 냄새가 솔솔 난다.
닮지 않으려는 이미지들 사이로 사찰의 단청무늬 또는 규방의 매듭 흔적이 언뜻언뜻 스친다. 또 크기와 굵기가 다른 원들이 변주하면서 들리는 환청은 틀림없는 꽹과리와 징소리다.
운석 밑을 걸어가는 슬픈 사내의 나이는 어느 새 쉰다섯. 11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니 다음번 개인전은 환갑을 넘길지도 모른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참회록> 중)
뉴욕 현지에서 작품을 팔아 작업실과 물감값을 충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인 뉴요커인 이상남. 다음번 참회록을 기대하는 것은 그가 쉰다섯임에도 스물넷의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남 개인전 ‘풍경의 알고리듬’은 서울 청담동 피케이엠트리니티갤러리(02-515-9496)에서 20일까지 열린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버리고 버렸다는데 흔적같은 단청…징소리…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로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윤동주 <참회록> 중) 1981년, 생면부지의 뉴욕으로 간 스물여덟 이상남은 스스로 절벽 위에 섰다. 당시 그곳은 안젤름 키퍼 등 독일 표현주의와 줄리언 슈나벨, 로버트 롱고 등 새로운 구상이 주류였다.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공포. 3년, 3개월 또는 3일마다 물갈이가 된다는 뉴욕 미술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 버려야 했다. 서양계보를 좇느니 나의 신화를 만들자며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참회록> 중) 회화란 무엇인가, 근원적인 물음에서 시작한 7, 8년 동안의 시행착오는 거울 닦기와 같은 것. 그런 끝에 이른 세계가 이미지의 원점인 원과 선분이었다. 뉴욕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안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고 문명화한 이미지의 범람이 근본으로 회귀하게 만든 것이다. 현재 이상남의 회화작업은 뉴욕의 옛 신화를 되풀이한다. 단일색 바탕에 원과 선분의 조합으로 된 이미지를 올리고 덧칠을 한 다음 손바닥 발바닥으로 갈아내 묻힌 이미지를 드러내는 식의 절차가 그것.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참회록> 중) 원과 선분은 이미지의 끝이자 출발점. 점이 쌓이면 선분, 선분이 쌓이면 면, 면이 쌓이고 회전하면 입체가 되기 때문. 이상남의 작업이 자연 또는 문명의 이미지와 다른 것은 원과 선분을 쌓되 이미 존재하는, 혹은 익숙한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인공적인 그의 작업은 외계문자, 미래 이미지로 보인다.
비밀은, 작가가 보유한 원-선분 조합으로 된 200여개의 아이콘. 오랫동안 작업노트를 쓰면서 마련한 이 아이콘들을 또다시 무작위로 조합해 존재하지 않았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기하학 원리를 처음 만났을, 10대 초반 무렵의 경이로운 감수성의 회복. 거기에다 선의 굵기와 형태의 차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는, 고교 때 배운 설계도의 실용성이 합쳐졌기 때문. 그런 다음이면 무한한 놀이공간이 펼쳐지지 않겠는가. 작품에는 제자리에서 맴돌며 환각을 즐기는 어린 아이, 또는 링과 공을 던지며 노는 피에로 같은, 평면에서 기하놀이를 하면서 환각을 즐기는 작가의 뒷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관객이 작품 앞에 오래 머무는 것은 작가의 자리에 자신을 대체해 같은 체험을 즐기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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