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보이첵’
생명의 원천은 물이다. 우리 몸은 75%가 물로 구성되었고, 태어날 때도 양수에서 출발했다. 그러니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이 물에 투신하는 것은 본능일 것이다. 물이라는 원천으로의 회귀, 죽음이 아니라 살고 싶다는 무의식적 갈망! 그러나 결국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도하는 그 물, 메디아가 동생을 죽였고 오필리어가 투신했으며 가난과 고독에 지친 사람들이 한강대교에서 뛰어들었던 그 죽음의 물은 따뜻한 생명의 물과 달리 얼마나 어둡고 차가울까.
의정부음악극축제의 대미를 장식했던 아이슬란드 극단 베스투르포트의 <보이첵>은 섬뜩한 물의 연극이었다. 신예 연출가 기슬리 외른 가다슨의 작품으로, 기슬리는 19세기의 미완성 희곡 <보이첵>의 저변에 흐르는 물의 이미지를 예리하게 포착했고 그것을 현실화해서 7톤 규모의 수조에서 배우들이 헤엄치고 다니게 할 정도로 대담했다.
가난과 조롱 속에서 분열증을 앓는 하급 군인 보이첵은 정수처리장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으로 변모되었고(덕분에 연극은 현대 환경문제까지 시사한다), 물이 든 어항을 뒤집어 쓴 채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는가 하면, 무대 앞면에 설치된 수조로 들어가 바람난 연인 마리를 익사시키기도 한다. 작품 속의 고통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관객에게 <보이첵>을 정서적으로 체험시키는 강렬함이 있었지만, 혹사당하는 배우들의 몸이 걱정될 정도로 잔혹하기도 했다.
반면, 이 죽음의 어항에서 보이첵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세상은 식인 열대어처럼 화려하다. 배우의 신체 표현을 극대화하는 기슬리 연출의 특징은 이번에도 줄에 매달린 군악대장의 화끈한 곡예로 이어졌다. 닉 케이브의 흥청거리면서도 우울한 음악과 냉소적 유머, 큐피드의 화살처럼 땅바닥에 꼽히는 장미꽃 등 보이첵을 짓누르는 세속의 권력과 욕망은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을 뿜어냈고, 한 순간의 연민을 느낄 틈도 없이 보이첵을 죽음의 물로 몰아갔다.
최근 구미연극계가 차세대 연극인으로 주목하는 기슬리는 이제 갓 삼십이다. 이보다 한발 앞서 국내에 공연되었던 <변신>이 원작의 복잡함을 단선적으로 축소한 소품이었다면, <보이첵>은 이 신예 연극인의 가능성과 대담함을 확인시켜준 수작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쯤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꽃처럼 젊은 기슬리의 야심만만한 무대를 보고 있자니,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꼬물거리는 한국의 젊은 연극이 자꾸만 연상된다. 우리 안에 숨어 있을 기슬리를 찾아내고, 그의 아이디어를 최대치로 구현시켜줄 시스템이 우리에겐 존재하는가.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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