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백년언약’
난공불락의 혼란.
<백년언약>은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오태석이 한국 현대극 100주년을 기념하며 국립극단을 위해 처음으로 쓴 작품이다. 오태석은 그 특별한 기념 공연에 걸맞게 일제 강점기부터 최근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굵직한 역사를 부챗살 펼치듯 늘어놓으며 유희하고 성찰한다. 또 전쟁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부터 동물과의 공존이라는 최근의 생태주의적 경향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그가 사용했던 연극적 기법과 모티브도 종합선물세트처럼 함께 얹었다. 생략과 비약, 스펙터클한 군중 신, 죽은 아이에게 젖 물린 어미, 이별한 부부, 심청이 모티브, 비무장지대(DMZ), 서사적 화자로 출연하는 쥐떼 등등.
그러나 평소와 다른 큰 잔치는 때론 얼마나 사람을 허둥대게 만드는가. 50여명의 출연진이 대거 등장하고 100년의 역사를 비틀기의 방식으로 연출하는 <백년언약>은 많은 것을 준비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과잉 장치와 사건으로 무얼 먹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수선스런 잔칫상이 되고 말았다.
무대는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아이마저 유산한 혈혈단신의 새댁(백성희)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할머니가 된 새댁이 꿈속에서 주마등처럼 자신의 삶을 훑어가는데, 그 인생역정이 한반도의 역사인 셈이다. 국립극장 대극장의 넓은 무대에 폐선처럼 떠 있는 객차를 공간 삼아 새댁은 해방부터 역사의 궤적을 밟는다. 굶주림에 아이를 잡아먹는 전쟁, 모자원, 양공주 클럽, 재건을 상징하는 연탄 공장, 좌파 젊은이의 시선을 교정시키는 안과 병동,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아이를 탈출시키는 소아과, 남편과 북한 아이들을 만나는 희망의 비무장지대.
100년을 펼쳐 보이니 구심력이 약했고, 은유와 환유라는 꿈의 언어에 의지해서 현실에 각주를 달다 보니 오태석 특유의 장식이나 비틀기도 과도할 정도의 힘을 발휘했다. 특히 마오쩌둥 사진과 경극까지 출몰하는 후반부로 가면, 그 과잉의 서사와 생경한 장식에 어지간히 소화력이 좋은 관객조차 교감의 끈을 놓쳐버리는 심정이다. 프로그램을 보니 이 공연은 청소년 공연예술제 참가작이기도 하다. 오태석과 국립극단은 역사에 무관심한 최근의 청소년들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의 ‘100년’을 알려줄 교사가 될 결심을 한 눈치다. 그러나 역사 교육이나 풍자도 좋지만 연극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 아닌가. 무대 위에 잔뜩 널린 잔칫상의 규모를 줄이고 소박하더라도 이해 가능한 <백년언약>의 재공연을 기대한다.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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