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화가 선무 첫 개인전
남에도 북에도 속하지 못하고
이름도 얼굴도 공개 못하지만
안팔려도 ‘옳은 말’ 전하고 싶다 그림 속의 한 소년단원이 한없는 존경심을 품어 거수경례를 하고, 맞은편 그림 속에는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 김정일 위원장이 오른손을 들어 답례를 한다. 서울 서대문구의 대안공간인 ‘충정각’에서 열리고 있는 ‘행복한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5월28일~6월27일)라는 제목의 개인전. 작가는 선무(37)라는 이다. 북한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이 좀 이상하다. 김정일 위원장 뒤편에 걸린 인공기가 거꾸로다. 붉은 별의 꼭짓점이 칼끝처럼 그의 머리를 향하고 있다. 애시당초 김정일 위원장 초상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다. 선무는 탈북작가다. 진짜이름은 말할 수 없고 얼굴도 공개할 수 없다. 남쪽에 부인과 13개월 된 아들이 있지만 부모와 형제를 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흰 셔츠, 푸른 바지에 붉은 스카프. 똑같은 차림새의 열두 소년단원들. 일제히 오른손을 90도로 꺾어 들어 경례를 하면서 한입 가득 구호를 물었다. “아 부러움 없어라 행복하여라. 김일성 원수님 품에 우리는 행복하여라.” 왼쪽 어깨마다 다른 계급장을 달았지만 모두 행복한 표정들이다. 한데, 그중 한 녀석이 바지 재봉선에 붙인 왼손의 가운뎃손가락으로 ‘엿먹어’라는 표시를 하고 있다. “나는 남한에도 북한에도 속하지 않는 조선인입니다. 그래서 북쪽이나 남쪽 작가가 모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좋든 싫든 그것이 저의 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1998년까지 황해도 한 사범대학의 미술학도였다. 중국의 친척한테서 돈을 구하기 위해서 두만강을 건넜다. 그 무렵 북한에서는 선거가 있었고 그는 선거를 거르면서 탈북자가 됐다. 4년여 중국에서 떠돌다가 2002년 남한에 온 그는 대한민국 국적을 얻고, 남한 대학을 재입학해서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화가가 됐지만 ‘탈북화가’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30년 가까이 살아와 몸에 밴 것들이 쉽게 바뀌겠는가. “남들은 미래를 지향하라고들 말합니다.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놓지도 못했는데 어디 그게 됩니까.” 그는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던 때를 잊을 수 없다. 강폭이 30~40m나 될까. 헤엄을 쳐도 쳐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눈앞에서 마주친 죽은 물고기. 자기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도강의 기억은 ‘두만강’ 연작으로 그려졌다. 불안한 기운이 가득한 잿빛구름, 부러지고 잘린 강변의 나무들. 한 사내가 생쥐처럼 물살을 가른다. 또다른 그림에서는 그 사내가 클로즈업돼 있고 불안한 눈앞에 물고기가 배를 뒤집고 있다. 그리고 연변에서 윈난까지, 그리고 라오스와 타이를 거치면서 겪은 탈북 과정의 불안함이 크고 작은 그림들 속에 녹아 있다. 그의 그림에는 파스텔 색조가 없다.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빨강 파랑 원색 계통의 색이 선명하다. 남쪽 사람들은 중국 그림 같다고 하고 제3국인들은 북쪽 그림 같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그릴 뿐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림이 팔려야 하지 않는가. 그는 “팔리든 않든 내 얘기를 할 것이다. 잘 팔리는 그림만 그리면 진실은 누가 얘기하겠는가?”라며 “돈 벌 생각이라면 딴 짓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무(線無)라는 그 이름대로 남-북의 선이 없어져 자신의 작품이 북한에서도 전시되기를 꿈꾼다. 탈북화가 아닌 그냥 화가로. “위쪽에서는 싫어하겠지만 옳은 말 했다고 다들 좋아할 겁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이름도 얼굴도 공개 못하지만
안팔려도 ‘옳은 말’ 전하고 싶다 그림 속의 한 소년단원이 한없는 존경심을 품어 거수경례를 하고, 맞은편 그림 속에는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 김정일 위원장이 오른손을 들어 답례를 한다. 서울 서대문구의 대안공간인 ‘충정각’에서 열리고 있는 ‘행복한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5월28일~6월27일)라는 제목의 개인전. 작가는 선무(37)라는 이다. 북한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이 좀 이상하다. 김정일 위원장 뒤편에 걸린 인공기가 거꾸로다. 붉은 별의 꼭짓점이 칼끝처럼 그의 머리를 향하고 있다. 애시당초 김정일 위원장 초상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다. 선무는 탈북작가다. 진짜이름은 말할 수 없고 얼굴도 공개할 수 없다. 남쪽에 부인과 13개월 된 아들이 있지만 부모와 형제를 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흰 셔츠, 푸른 바지에 붉은 스카프. 똑같은 차림새의 열두 소년단원들. 일제히 오른손을 90도로 꺾어 들어 경례를 하면서 한입 가득 구호를 물었다. “아 부러움 없어라 행복하여라. 김일성 원수님 품에 우리는 행복하여라.” 왼쪽 어깨마다 다른 계급장을 달았지만 모두 행복한 표정들이다. 한데, 그중 한 녀석이 바지 재봉선에 붙인 왼손의 가운뎃손가락으로 ‘엿먹어’라는 표시를 하고 있다. “나는 남한에도 북한에도 속하지 않는 조선인입니다. 그래서 북쪽이나 남쪽 작가가 모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좋든 싫든 그것이 저의 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1998년까지 황해도 한 사범대학의 미술학도였다. 중국의 친척한테서 돈을 구하기 위해서 두만강을 건넜다. 그 무렵 북한에서는 선거가 있었고 그는 선거를 거르면서 탈북자가 됐다. 4년여 중국에서 떠돌다가 2002년 남한에 온 그는 대한민국 국적을 얻고, 남한 대학을 재입학해서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화가가 됐지만 ‘탈북화가’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30년 가까이 살아와 몸에 밴 것들이 쉽게 바뀌겠는가. “남들은 미래를 지향하라고들 말합니다.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놓지도 못했는데 어디 그게 됩니까.” 그는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던 때를 잊을 수 없다. 강폭이 30~40m나 될까. 헤엄을 쳐도 쳐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눈앞에서 마주친 죽은 물고기. 자기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도강의 기억은 ‘두만강’ 연작으로 그려졌다. 불안한 기운이 가득한 잿빛구름, 부러지고 잘린 강변의 나무들. 한 사내가 생쥐처럼 물살을 가른다. 또다른 그림에서는 그 사내가 클로즈업돼 있고 불안한 눈앞에 물고기가 배를 뒤집고 있다. 그리고 연변에서 윈난까지, 그리고 라오스와 타이를 거치면서 겪은 탈북 과정의 불안함이 크고 작은 그림들 속에 녹아 있다. 그의 그림에는 파스텔 색조가 없다.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빨강 파랑 원색 계통의 색이 선명하다. 남쪽 사람들은 중국 그림 같다고 하고 제3국인들은 북쪽 그림 같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그릴 뿐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림이 팔려야 하지 않는가. 그는 “팔리든 않든 내 얘기를 할 것이다. 잘 팔리는 그림만 그리면 진실은 누가 얘기하겠는가?”라며 “돈 벌 생각이라면 딴 짓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무(線無)라는 그 이름대로 남-북의 선이 없어져 자신의 작품이 북한에서도 전시되기를 꿈꾼다. 탈북화가 아닌 그냥 화가로. “위쪽에서는 싫어하겠지만 옳은 말 했다고 다들 좋아할 겁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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