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원전유서’
지원은 많아졌으나 창작의 수준은 높아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어언 십년. 그런데 만루 홈런이 터졌다. 문화예술위원회가 연극 창작을 지원해주는 프로젝트인 ‘창작예찬’의 두 번째 작품 <원전유서>가 그 주인공. 이십대 무명작가 김지훈을 발굴했고, 연출가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이 창작극 역사상 가장 긴 분량에 -실제 순수 공연 시간만 3시간 50분이다-현실비판과 신화적 상상력, 장광설의 사변과 시어를 넘나드는 <원전유서>를 공기돌 놀리듯 능란하게 소화했다.
작품의 공간은 쓰레기 매립지다. 이 공간은 가치를 상실하면 모든 것을 폐기처분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음화로 현대 연극이 자주 호명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원전유서> 역시 쓰레기가 산처럼 쌓인 무대로 자본주의가 용도 폐기한 사람들을 불러낸다. 치매에 걸린 노인네, 광인, 가난한 사람들이 주소도 없는 쓰레기 산의 유령 주거자로 떠돌고, 그 땅에 주소를 부여하려는 지식인 운동가의 안간힘도 존재하지만 부동산이라면 쓰레기마저 삼키는 자본주의 욕망에 무력해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상징으로서의 쓰레기 매립지만이 아니라 갓난아기의 얼굴에 파리떼 들끓던 참혹한 난지도의 기억도 존재한다. <원전유서>의 탁월함은 관념적 상징으로 국한될 수 있는 쓰레기 매립지에 살아 있는 인간의 삶을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찌나 생생하고 담담한지 작가의 과거사가 궁금해질 정도로, 김지훈은 변소간이 부엌이 되고 이유 없는 폭력에 두 아이를 죽여야 하는 어진네(김소희 연기)의 가난과 절망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또 한 편의 지옥 같은 현실을 초극하기 위해 나무와 사슴이 숨쉬는 신화의 세계를 제안한다. 그 생명의 신화가 무대 위에서 가장 순결한 존재이면서도 죽어야 했던 두 아이의 ‘유서’이리라. 쓰레기 같은 세상을 초극하라!
<원전유서>의 초고는 6시간 분량이었다고 한다. 축약 탓인지 2막에서 간헐적으로 흐름이 끊기고 젊은 작가의 용광로 같은 열정으로 현실과 알레고리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균형을 상실하는 지점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윤택은 능란한 연출력과 군중 장면으로 작품을 조율했고, 시적인 대사일수록 힘을 발휘하는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은 작가의 수사와 장광설에 인간적 매력을 부여했다.
특히 어진네를 맡은 김소희는 이 연극의 꽃이다. 장광설과 연극성으로 끓어 넘치던 무대는 김소희의 ‘미안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어진 어머니로 진정되고 수렴되면서 빛나는 존엄함을 확보했다.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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