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마사 구니야스 <똬리 튼 용>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건축도자-올드’전
김태곤 <안동가옥>
최성재 <만다라>
청나라 벽돌 등으로
조선말 청년들의 꿈
다른 눈으로 형상화 18세기 조선 청년 박제가(1750~1805)의 눈을 사로잡았던 청나라의 벽돌. 연경의 누대, 성곽, 담 등 높은 것은 물론이고 교량, 분묘, 봇도랑, 방구들, 둑 등 지하 깊숙한 곳까지 벽돌로 입힌 듯했다. 그런 탓에 백성들은 수재와 화재, 도둑, 젖고 썩거나 무너지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어 보였다. 우리나라도 예로부터 벽돌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벽돌로 쌓은 탑이 삼국·통일신라 때 유행하여 그 자취가 신세동 7층탑, 동부동 5층탑 등 안동지방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또 무덤과 궁궐에도 쓰여 낙랑시대 전축분, 백제 송산리 6호분, 무녕왕릉에서 발견되며 조선 궁궐의 기단부나 꽃담, 굴뚝 등에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사회의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던 탓에 벽돌은 특별한 수요에 응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졌을 뿐 국가의 성곽과 궁궐, 민가의 벽과 담에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벽돌, 정조대왕으로 하여금 화성을 쌓아 황금빛 꿈을 꾸게 했던 벽돌이 200여년 이 지나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로 하여금 다시금 황홀경을 연출하게 하고 있다. 경남 김해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서 여는 ‘건축도자-올드’전이 그것이다. 국내외 작가 10여명이 200이나여년 전 사용됐던 벽돌과 기와를 이용해 7월 한 달을 꼬박 먹고 자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옛 도공과 현대 예술가들의 손길이 만나 일궈낸 장관이다.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은 현대 도자의 가능성을 건축도자에서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2006년에 문을 연 세계 최초의 건축도자 전문 미술관. “지금도 사용되는 평범한 소재지만 옛것을 씀으로써 그 속에 쌓인 시간성이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의 개성과 만나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가를 보고자 했다.” 전시를 기획한 조성자 학예감독은 전시장이 박물관이 아니라 미술관임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한나라 가형명기
토머스 라우어만 <호버크라프트>
최성재씨는 낙랑전돌로 거대한 책꽂이 두 개를 채웠다. 뉘여서 쓰이는 벽돌을 세워 꽂음으로써 측면의 추상 요철문양이 고서의 책등이 됐다. 곧 전돌은 수천년 전 선조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된 셈이다.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주제가 몹시 무겁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와를 선택한 작가들은 벽돌 작가에 비해 재료의 조형성에 중점을 둔 것이 특징. 수키와를 앞뒤 맞춰 높이 쌓아 앞면과 뒷면, 멀고 가까움, 또는 이동에 따른 느낌의 변화를 보여준다. 또 비늘 같은 기와 모양을 살려 온몸이 딱딱한 비늘로 덮인 동물 천산갑을 만들거나, 아예 기와·벽돌·타일의 조형성만을 살려 비디오 설치작품을 만드는 식이다. 호사가들이 호고 취미로 진열장 안에 모셔두던 벽돌과 기와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어 보자는 또다른 의도에 썩 부합한다. 놓칠 수 없는 것은 가형명기들. 시간여행은 한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형명기는 내세에서는 좋은 집에 살라는 뜻에서 죽은 이와 함께 묻은 집모양 도기 부장품. 대개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이고 풍류를 즐길 만한 동그란 초가별채다. 아래 층에서 가축을 키우는 당시의 풍습, 개한테 커다란 집을 주고픈 주인의 개사랑도 볼 수 있다. 각양각색 100여 채 이상의 집이 모이니 수천년을 건너 조선땅에서 한나라 마을이 만들어졌다. 컹컹 개 짖는 소리, 떡장수가 떡 사려~ 외치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벨기에 작가 마크 드 프라이에가 찍어 제시한 전통가옥 사진에서 한-중-일의 차이를 구별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김해 글·사진/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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