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리뷰] 표현은 거칠지만 내용은 진국일세

등록 2008-08-21 21:07

연극 ‘고래’
연극 ‘고래’
연극 ‘고래’
이해성이 쓰고 연출한 <고래>(극단 백수광부, 연우소극장 8월31일까지)는 아직 거칠다. 마지막 공정을 끝내지 못하고 진열대에 서둘러 나온 상품처럼 세련미나 감각적 완성도가 부족하다. 그러나 포장에 매혹되었다 실체에 허탈해지는 상품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고래>는 서툴고 성긴 표면을 가졌지만, 표면 아래의 수심이 고래라도 뛰어놀 듯 깊고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1998년 강원도 속초 해안으로 침투했다가 어망에 걸려 집단 자살한 북한의 잠수정 사건을 소재로 취했다. 극적 공간은 남쪽 바다에 잠입한 북한 잠수정이라는 제한된 공간. 등장인물은 잠수정을 운행하는 네 명의 선원과 공작사업을 수행하고 돌아온 남파 간첩 세 명이 전부다.

카메라를 따라 무수히 이동하고 수천 명이 출연하는 전투장면도 손쉽게 만드는 영화가 탁 트인 자유의 예술이라면, 생예술(Live Art)인 연극은 무대라는 조그만 공간에서 세계와 교신하는 제약 많은 예술이다. 그러나 좋은 극작가는 그 제약에 굴하지 않고, 핀셋으로 집어내듯 세상의 본질을 추출할 줄 안다.

<고래>에는 그런 씨앗이 있다. 지도와 잠망경으로 허술하게 장식한 잠수정 공간에서 단 한 번의 이탈 없이 남과 북, 삶과 죽음, 이념의 지배를 받는 잠수정과 심해를 자유롭게 누비는 고래 소리의 대비, 남한에서 콘돔을 훔쳐왔다고 좋아하는 전반부의 희극성과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죽어가는 후반부의 비극성을 자연스럽게 버무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쓴 이해성이 연극배우로서의 경력은 길지만 극작가로서의 경력이 짧다는 점을 감안하면-<고래>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조그만 무대를 용광로 삼아 한반도의 모순과 삶의 부조리를 끓여낸 작가의 솜씨가 주목할 만하다. 단막극을 장막극으로 확장하면서 생겨난 디테일의 부족이나 감상주의를 극복한다면 문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연출가 이해성은 작가 이해성에게 썩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첫 연출이어서인지 단선적이고 남성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조율하지 못했고, 환하고 시끌벅적한 무대 분위기는 심해를 숨어다니는 잠수정이 아니라 시장통 같다. 다행히 작품의 거친 분위기는 삶을 선택한 두 명의 선원이 희박해지는 산소를 마시면서 죽어가는 후반부에 오면 차분히 정제된다. 특히 처음으로 잠수정을 탄 신참이 남쪽에서 태어난 어머니의 고향 흙을 뿌리는 장면에 도달하면, <고래>는 우리를 둘러싼 명분없는 대립과 어처구니없는 희생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시적인 성찰을 이루어낸다.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