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용의 ‘Reality+image 804-806’, 김영원의 ‘그림자의 그림자’
조각가 김영원·벽돌작가 김강용
재료가 가진 색깔 그대로를 고집하던 김영원 조각가가 색을 쓰기 시작했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02-734-0458)에서 10월10일까지 여는 개인전. 에프아르피(강화 플라스틱)는 물론 브론즈(구리)로 만든 상에도 알록달록 색을 입혔다. 예순둘, 젊지 않은 나이에 부담이 크지 않았을까.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맞춰 소통하려는 노력이죠.” 작가는 그동안 시류에 밀리고 초점을 잃은 듯한 느낌이었는데, 일단 색을 쓰고 나니 현실로 들어온 듯하다고 말했다. 지금의 젊은 팝 세대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소통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같은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걸면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겠느냐는 것.
색깔만 입혔을 뿐 작가의 개념적 작업은 여전히 그대로다. 인체를 앞뒤로 잘라 앞면은 버리고 뒷면만 이용하는 것.
얼굴과 가슴을 떼어내니 성별도 없고 너와 내가 없다. 다만 인체가 있을 뿐. 2000년대부터 해 온 이런 방식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마음속을 꾸준히 들여다보니 밑도 끝도 없고 없음에서 없음이 나오더라는 것. 이를 표현하려다 보니 눈·코·입을 떼어내고 부조를 만들었다.
한걸음 나아가 부조를 떼어내 환조(전체 면이 입체인 조각, 소조상)의 공간에 놓으니 배경을 모두 삭제한 인체 사진과 흡사한 느낌이 들었다.
인체라는 구상의 굴레를 벗어나고 보니 비틀고 구부리고 자르고 붙이는 게 자유로워졌고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의 인간을 말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또 개별 인간이 사라지고 욕망으로만 존재하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무리 기능이 뛰어난 상품이 나오고, 아무리 실력이 있는 정치가가 등장해도 브랜드가 없으면 행세하지 못하는 세상이 아닌가. 작가는 그런 미친 세상을 향해 본질 회복을 주문하고 있다. 그 점에서 작가의 색깔 사용은 처절함으로 읽힌다.
벽돌작가인 김강용(58)씨 역시 색을 쓰기 시작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02-720-1020)에서 10월19일까지 여는 개인전에서 그는 모래 벽돌 화면에 색을 입혔다.
그동안 흙손으로 모래를 빤빤하게 깔아펴고 선과 그림자로만 벽돌을 그려온 작가는 ‘벽돌작가’라는 타이틀이 못마땅했다. 자신은 형태와 구도의 실험을 하고 있는데, 겉으로 드러난 모양을 보고 그렇게 일컬으니 억울하다는 것. 이놈의 세상은 겉보기로만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성찰과 비판도 온데간데없다.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가운데서 사방으로 퍼져가는 등 구도적인 작업 방식도 그렇다.
작품에 고단한 실험이 녹아 있지만 눈에 뵈는 것은 벽돌뿐이니 벽돌공장의 한 장면을 실사한 것과 뭐가 다르냐는 것. 하기는 그렇다. 작가는 색 실험을 하면서도 걱정이다. 색벽돌이 세상에 어디 있어 하는 뒷말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 걱정할 것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 아닌가. 임종업 선임기자
작품에 고단한 실험이 녹아 있지만 눈에 뵈는 것은 벽돌뿐이니 벽돌공장의 한 장면을 실사한 것과 뭐가 다르냐는 것. 하기는 그렇다. 작가는 색 실험을 하면서도 걱정이다. 색벽돌이 세상에 어디 있어 하는 뒷말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 걱정할 것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 아닌가. 임종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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