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윤영선 극작 연극 ‘여행’ 보니
‘예술한다’는 자의식으로 온갖 멋을 부리지만 공허한 작품이 세상엔 꽤 많다. 그러나 드물게 어떤 작품은 숨 쉬듯 놀이하듯 예술하다 진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작고한 윤영선 선생의 후기작 <여행>(10월12일까지 대학로 정보소극장)이 그런 작품이다.
작가는 객석을 자주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던 특유의 사변적이고 해체적인 경향을 <여행>에 와서 사뿐히 들어냈다. 대신 그 자리에 질그릇이라도 빚듯 소박하고 범속한 일상을 그렸다. 그의 오랜 지기인 연출가 이성열 역시 오려붙인 보드판 몇개를 제외하곤 별다른 무대 장치도 없는 소박한 워크숍으로 그에 응했다. 그러나 그 가난한 무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익살스러우면서도 서늘한 성찰을 담은 채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다녀왔고, 이제 윤영선의 대표작이 되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여행>은 중년 남자들이 친구의 느닷없는 죽음을 계기로 장지를 다녀오는 일박 이일의 짧은 여정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여행>은 그 이상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세상에 여행하듯 잠시 태어났다 떠나야 하는 모든 인생에 대한 메타포이고, 그를 반영하듯 무대는 서울역사에서 출발해서 장지를 거쳐 터미널로 환속한다. 바람 같은 인생에 아무런 방점도 필요 없다는 듯, 잠시도 집에 머무르지 않고 길 위에서 떠도는 연극.
그런데 죽음을 향해 떠나는 그 여정은 어쩌자고 그렇게 부박하고 익살스러울까. <여행>은 작정이라도 한 듯 죽음의 근엄함을 지우고, 삶의 통속성을 부각한다. 출발부터 마시기 시작한 팩소주와 음담패설, 썰렁한 장례식장의 단골풍경인 고스톱 화투판, 상 위의 플라스틱 접시와 국그릇, 비닐봉지로 말아놓은 철 지난 선풍기 류의 흉물스런 오브제들, 한바탕 싸움과 욕설, 화장터에서의 감상적인 술주정과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의 발작적인 노래자랑 등등.
<여행>은 그렇게 솔직하게 삶의 익살광대극을 드러내며 우리를 웃긴다. 하지만 한편에선 조악한 삶 속으로 문득 끼어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쓸쓸함을 노련하게 연출하면서, 초연 이후 더 무르익은 모습을 보여준다. 배우부터 스태프에 이르기까지 한 명의 교체도 없이 지속적으로 이 작업에 임한 제작진들의 애정과, 작가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 경험이 <여행>을 농밀하게 감싸고 있기 때문이리라.
고 윤영선 작가의 추모공연은 <여행> 외에 앞으로 <키스>와 <임차인>으로 이어지면서, 그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지기들에 의해서 계속 공연될 예정이다. 느닷없는 죽음은 삶에 공동을 만드는 법이다. 추모의 여정을 잘 끝내고 그들이 익살광대극 같은 삶으로 무사하게 귀환하길 바란다.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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