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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한약재로 곰삭힌 ‘색채 굿판’

등록 2008-10-07 19:48

한지를 덧붙이며 작업 중인 작가 함섭씨. 아래 사진들은 그의 작업실 벽에 붙은 한지 그림들(왼쪽)과 작업실 내부 집기들이다.
한지를 덧붙이며 작업 중인 작가 함섭씨. 아래 사진들은 그의 작업실 벽에 붙은 한지 그림들(왼쪽)과 작업실 내부 집기들이다.
붓 버린 ‘한지화’ 작가 함섭
닥껍질 부산물 안료 삼아
용뇌와 천궁 섞은 풀 먹여
바라보면 정신이 맑아져

마라토너 함기용씨 조카

“일을 마치고 택시를 타면 한의사가 아니냐고 물어옵니다.”

30년 동안 한지를 이용해 그림을 그려온 ‘한지화’ 작가 함섭(66)씨는 자기 작품에선 한약 냄새가 난다고 했다. 닥종이에 한약재 용뇌와 천궁을 섞은 밀가루 풀을 먹이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자신의 그림은 좀이 슬지 않을뿐더러 그림을 대하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8일부터 서울 공평아트스페이스(02-3210-0071)에서 개인전을 여는 함씨의 화실을 찾았다. 화실은 지하철 5호선 상수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다.

작업실을 열자 불빛과 함께 한약 냄새가 훅 끼쳤다. 외출을 앞둔 그림들에서 냄새가 배어나왔다. 작가는 작업대 옆 포대를 열어 보였다. 흰 가루 형태의 용뇌와 바싹 마른 천궁이었다. 약재를 섞은 그의 그림은 일종의 한약 그림. 작가는 한약 화가인 셈. 실제, 붉은빛이 도는 얼굴에 백발인 그는 영락없는 한의사의 용모다.

“작은아버지가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1등을 한 함자 기자 용자입니다.” 한의사 집안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마라톤을 했어요. 기록이 썩 좋지는 않았어요. 어느 날 작은아버지가 너는 국가대표는 어렵겠다며 그만두라고 하시더군요.” 작은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했고 마라톤은 ‘가업’이었다. 미술은 가업에서 탈락한 결과였다.

그는 자신을 ‘꼴통’이라고 소개했다. “국민학교 때 담임이 배구공을 놓고 그림을 그리라고 했어요. 남들은 모두 팽팽한 그대로 그렸는데, 나는 찌그러지게 그렸어요. 남들과 같은 걸 그리기 싫었던 거죠. 시키지 않은 것 한다고 담임은 꿀밤을 먹였어요.”


한지의 선택도 비슷하다. “대학 졸업 뒤인 1970년대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과 비슷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배경은 다를지 몰라도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자고, 똑같이 숨쉬잖아요.”

미술사 공부 중 조선시대 공예품의 85%가 종이 공예임을 알게 된 작가는 특히 종이함에 주목했다. 닥종이를 여러 겹 붙여 모양을 갖추고 그 위에 문양을 올려 옻칠을 한 그것. 작가에게 음식이자 공기인 안료와 붓을 그는 버렸다. 옛 전통에서 닥나무를 선택하고 그동안 자신이 배운 서양화 기법을 접붙였다. 그 뒤로 30년 ‘주~욱’ 오로지 종이의 가변성을 이용한 조형성에 치중해 닥나무를 유화, 아크릴에 버금가는 매체로 우뚝 세웠다. 그의 그림은 국내보다 외국에서 인기다. 미국 마이애미와 샌프란시스코, 프랑스, 네덜란드 등 아트페어에서 종종 ‘솔드아웃’(매진)된다는 설명이다.

한지화 그리기는 이렇다. 삼합 종이에 색지, 그 위에 닥나무 껍질로 씨줄 날줄을 붙이고 투명 한지를 붙이면 ‘함섭표’ 밑바탕 완성. 옛날 토담집을 지을 때 수수깡을 엮어 벽틀을 만드는 방식을 원용했다. 그 바탕에 고운 닥종이 죽을 부은 뒤 플라스틱 솔로 두들겨 편다. 그 다음에는 액션 페인팅. 원조 닥나무 껍질, 펄프, 오방색 한지, 한문 습자지, 뜯어낸 옛 책 등 갖가지 중간 또는 완제품 닥지를 안료로 그림을 그린다. 오방색 한지는 홍화·치자·황토 등 천연안료를 썼다. 물에 젖어 흐물흐물한 안료를 휘둘러 던지면 획이 되고, 흩뿌리면 면이 되어 화폭은 마치 굿판이 되고 잔치가 된다. 초벌그림을 벽에 세워 멀리서 가까이서 모양과 색깔을 잡아 그림을 키워나간다. “종이가 더 이상 종이가 아닐 때 작품이 완성되지요.”

그 다음은 숙성시키기. 그림은 몇 달만에 그려져도, 화면의 색채가 제대로 익으려면 적어도 2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과거로 갈수록 갈색 바탕이 깔리면서 알록달록 생짜 색깔들은 스스로 곰삭아 이웃색과 이물 없이 어우러졌다. 불혹 또는 이순의 경지처럼. 회화? 콜라주? 부조? 그는 자신의 작품을 피카소가 들고 가도 ‘저거는 함섭 거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고 자부했다.

“어디를 가도 하룻밤을 넘기기 힘듭니다. 눈 뜨고 일어나 제 작품을 보지 않으면 허무해요.” 그는 작업실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전주에서 산 옛책 한 트럭을 포함해 종이 뭉치가 그득한 선반은 그에게 식량 창고다.

작가는 예순여섯 나이에 분홍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다. 요즘은 무릎을 아끼려 등산 대신 걷기를 한다. 인생 설계도 걷기처럼 느긋하게 30년 단위다. “과거 30년에 걸쳐 함섭표 바탕을 다졌으니 앞으로 30년, 90살까지 작품을 해야지요.”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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