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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나무의 ‘초상’을 찍다

등록 2008-10-28 19:48

이명호 개인전 ‘트리’

흔히 볼수있는 나무 뒤
대형 캔버스 걸고 작업

초상 사진 하면 으레 사람이다. 몸에 밴 품격과 세월, 즉 인격을 잡아내는 게 요체일 터. 사람만 초상 사진이 가능한가? 예컨대 나무는 어떨까. 사람에게 인격이 있다면 나무에는 ‘목격’(木格)이 있지 않을까.

실제로 나무의 초상 사진을 찍는 작가가 있다. 이명호씨가 그렇다. 2004년부터 시작해 꼬박 4년이다. 그동안 열여덟 그루의 초상 사진을 찍었다.

우선은 ‘목격’ 있는 나무를 수소문하고 대면하는 게 첫 일. 속리산 정이품송, 당산나무처럼 전설이나 설화가 덧붙은 것은 사양한다. 또 소나무, 대나무처럼 나무의 격 외에 의미가 부여된 것도 제외한다. 이들은 목격이 아니라 ‘변형된 인격’이 부여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작가가 선호하는 나무는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흔한 나무들이다. 개울가 자작나무, 강변 버드나무, 공원 단풍나무 등. 사람으로 치면 동네 슈퍼 아저씨, 목욕탕 집 아줌마에 해당한다. 이들 나무가 그곳에 자리를 잡은 뒤 시간과 만나서 이뤄낸 밑동의 앉음새와 줄기의 굴곡, 가지의 뻗음에서 작가는 나무의 ‘프로필’을 발견하고 이를 잡아내는 것이다.

나무의 초상은 똑 이렇게 찍는다. 두 대의 크레인으로 나무 뒤쪽에 흰 캔버스를 친다. 물론 크레인이 접근할 수 있는 넓게 펼쳐진 땅 위의 나무가 대상이다. 작업을 시작했다가 바람이라도 불면 끝이다. 웬만한 나무 높이는 10m가 넘기 마련. 이를 품으려면 캔버스가 15m는 넘어야 하는데, 이쯤이면 살랑바람도 ‘쥐약’이기 때문이다. 4년 넘도록 18그루밖에 찍지 못한 것은 그 탓이다. 그렇게 찍은 사진에서 크레인, 와이어 등을 포토샵으로 지운다.

작품을 멀리서 보면 터진 공간에 세운, 나무 광고판처럼 보인다. “웬 나무 광고?”


의아함을 풀기 위해 한발짝 가까이 가면 비로소 나무 뒤에 쳐진 캔버스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나무의 초상 사진을 찍은 작가의 무모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 작가 뭐야?”

초상 사진은 초상화의 변주. 근대 회화의 출발점이었던 초상화의 대상은 왕과 그 가족이었다.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거치며 그 대상이 확대되었지만 사람에 국한됐던 터. 20세기 초 한 프랑스 작가가 서커스단 소속 코끼리 뒤에 펼침막을 치고 초상 사진을 찍은 적이 있지만 나무 초상은 금시초문이다. 작가는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한테 사람과 같은 격을 부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가을 단풍을 보면 울컥 눈물이 난다”며 “사람들마다 나무에서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고 했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나무의 초상은 수종, 수형, 계절 등에 따른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발걸음을 옮겨 다른 사진 앞에 서면 기대가 배반당하지 않았음을 안다. 작가는 수종과 계절은 물론이고, 밤에 인공 조명을 밝혀 명암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나무의 표정을 잡아내거나 역광으로 캔버스에 비친 나무의 실루엣을 포착하기도 한다.

흰 캔버스는 주변 환경에서 나무를 떼어내는 구실을 한다. 배경의 시각적인 잡음이 없어지면서 나무 자체의 명료한 상이 드러나고 보는 이는 비로소 나무에 집중하게 된다. 나아가 잔가지들의 삐침이 사생 나온 작가의 목탄 스케치처럼 눈에 들어온다. 이와 함께 사진 한가운데의 흰 사각형, 그 안에 부분적으로 배경이 소멸된 나무의 초상은 나머지 배경과 컬러-무채색, 실제-추상, 현실-비현실 등으로 대비가 되면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또 흰 사각형이 거대한 돛이 되면서 대지를 밀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환상을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흰 사각형은 주름이 있는 캔버스임이 드러나고 작가에 의해 설치된 것임을 환기시킨다. 도대체 어떻게 설치됐을까, 이런 작업을 한 작가는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등으로 궁금증이 확장된다.

일종의 소격효과. 이런 여러 겹 장치는 ‘사진의 사각틀이란 환상 또는 비현실적일 수 있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명호 작가의 개인전 ‘트리’는 11월19일까지 서울 홍대 앞 갤러리 잔다리(02-323-4155)에서 열린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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