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교향곡 ‘담백한 재해석’
화사한 곡상에 생기 불어넣어
화사한 곡상에 생기 불어넣어
그들의 연주가 시작되자 연주회장 안은 세련된 소리의 물결로 넘쳐났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정상급 관현악단, 현재 유럽에서 한창 활약 중인 인기 지휘자, 게다가 프로그램이 국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브람스 교향곡 전곡이라니.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20일과 21일 예술의전당에서 가진 콘서트는 오래전부터 화제의 대상이었다.
감탄과 아쉬움이 교차했던 이번 무대의 주역은 역시 베를린 필이었다. 첫째 날과 두 번째 날 출연하는 일부 파트 단원들을 다르게 기용할 만큼 인적 자원이 풍부했고, 그 주자들 한 명 한 명의 기량이 솔리스트 수준이어서 탄복을 금하기 힘들었다. 독주자로서도 명성 높은 엠마뉴엘 파후드의 플루트와 알브레히트 마이어의 오보에, 슈테판 도어의 호른은 물론이요, 1번 2악장에서 감미로운 선율을 선보였던 야스나가 토루 등 현악 주자들의 개인기가 하나같이 뛰어났다. 음악 진행의 적재적소에서 악센트를 또렷하게 새겨 넣는 팀파니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현대 오케스트라가 다다를 수 있는 기능미의 극치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윤택한 질감으로 매끈하게 단장된 사운드를 제시한 것이었다.
래틀은 태산준령처럼 버티고 서 있는 전임자들의 위업에 신경 쓰기보다는 브람스 교향곡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꽉 짜인 외곽 음형, 탄력적인 리듬으로 요동치는 내성부, 야무지게 다져진 고밀도 조형감. 래틀의 브람스는 곡 전개가 명쾌하고 악음의 몸피가 날씬하며, 세부 표정이 깔끔했다. 풍려한 화음으로 상징되는 카라얀 시대나 정치한 음감을 중시했던 아바도 시대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구별되는 신세기풍 브람스라고나 할까. 이러한 그의 접근 방식은 첫째 날 후반부에 공연됐던 2번과 멋들어지게 부합되었다. 작품의 화사한 곡상을 넘치는 생기와 싱그러운 뉘앙스로 살려내어 관객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특별히 세찬 추진력으로 성큼성큼 밀어붙이는 4악장이 압권으로,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그렇지만 모든 면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북독일적인 우수나 어둑어둑한 색채가 희박해진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중후한 브람스에 익숙한 애호가에게는 래틀의 담백한 연주 스타일이 교향곡 네 편 고루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지는 못하였다. 홀의 조건에 적응이 덜 된 탓인지 1번의 경우 종종 현과 관 파트의 앙상블이 맞지 않는 순간이 엿보였고, 두 번째 날 공연된 3번 및 4번의 느린 악장은 악절을 유창한 호흡으로 묶어 기다랗게 이끌고 가지 못할 뿐더러 깊은 서정성이 전달되지 않아 애석했다. 그래도 변주곡 형식으로 이루어진 4번 종악장은 전반 삼 악장을 만회할 만치 훌륭했다. 각 변주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부각시키며 음폭을 서서히 넓혀나가는 후반 변주부가 공연의 대미를 힘있게 마감했다.
이영진/고전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