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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리뷰] 섀퍼 ‘고곤의 선물’ 재공연

등록 2008-11-25 19:23

쉽고 편안해진 인간 이야기
초연보다 관객반응 더 좋아
뚝심 좋은 재공연이다. 실험극장이 피터 섀퍼의 <고곤의 선물>(구태환 연출, 11월18~23일)에 다시 한번 도전했다. 댐슨(Damson), 영어식 욕설에 빗대자면 ‘저주받은 신의 자식’(God dam)이라 풀이되는 이름을 가진 극작가의 죽음을 파헤치면서 유럽의 문명과 역사와 신화를 훑는 작품이다. 공연 시간도 세 시간이나 되는 대작이고 자칫 관념으로 흐를 수 있는 내용이라, 말랑거리는 멜로나 코미디만 재공연되는 추세에 꽤 무모한 시도를 한 셈이다.

그런데 초연보다 결과가 더 좋다. 2003년 초연 당시엔 작품의 중량감에 눌려 유연한 숨쉬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심각하고 관념적인 문제작이었다. 그런데 재공연에 와서 실험극장과 새로 연출에 참여한 구태환은 쉽고 편안하게, 무엇보다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의 이야기로 작품을 펼쳐놓는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원작의 중층구조를 기능적으로 풀어낸 연출력, 테라스의 창으로 등·퇴장하는 신화적 존재들의 환상성, 배우들의 호연이 큰 몫을 했다.

<고곤의 선물>은 술주정뱅이의 아들인 극작가(정동환 연기)와 평화주의자이자 저명한 학자의 딸(서이숙 연기)의 부부생활을 축으로 삼는다. 열렬히 사랑하는 둘은 자식을 낳는 대신 함께 희곡을 창작한다. 남편은 쓰고 이성적인 아내는 조율한다. 말하자면 말년의 섀퍼는 이 작품에 와서 연극이라는 창작행위에 대한 고뇌를 극화한 것이다.

그런데 술주정뱅이인 디오니소스의 후예와 학문의 수호신인 아폴론의 후예가 어떻게 공존하겠나. 인류 역사상 광기와 이성, 복수와 용서라는 상극의 두 세계가 평화롭게 조화했던 시절은 고대 그리스 시절에나 존재했고, 우리를 둘러싼 디스토피아의 세상에서 둘은 서로 증오할 뿐이다. 그리하여 창조적 열정의 고갈을 상징하는 고곤(메두사)이 찾아오자, 댐슨은 스스로를 죽이고 아내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공연이 초반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다. 빠른 대사들은 잘 들리지 않았고, 조명의 잦은 분할은 웅장해야 할 무대를 소박하게 축소시켰으며, 작가의 방대한 지식은 객석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섀퍼와 제작진은 그 소소한 한계를 훌쩍 넘어 예술과 역사의 핵심적인 갈등과 고통으로 박진감 있게 나아갔고, 후반부에 도달하면 정동환과 서이숙은 두 마리의 맹수처럼 엄청난 카리스마로 객석을 장악하였다.

작품 안에서 고곤은 예술가를 얼어붙게 만든다. 그러나 작품 밖에서 예술가들은 고곤을 이겼다.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사진 극단 실험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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