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두 중견 연출가 이성열(왼쪽)씨와 박근형씨가 지난 27일 서울 혜화동의 한 극장 앞에서 내년 초 무대에 올릴 신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가족 부조리극 ‘너무 놀라지 마라’
이민자 문제 다룬 ‘뉴욕 안티고네’ “우리는 언제나 아이엠에프 새해 사회비판적 작품 늘 것” 올해 대학로 연극판은 불황의 한파에 뮤지컬과 퍼포먼스 등 볼거리 공연의 쏠림 현상이 겹쳐 꽁꽁 얼어붙었다. 그렇다고 희망까지 접을 수는 없는 일. 세밑에 중견 연출가 박근형(45)씨가 신작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성균관대 건너편에 자리한 극단 골목길 연습실을 찾아갔다. 20평 남짓한 연습실에선 박근형씨가 담배를 잘근잘근 씹으며 배우들의 동작 점검에 한창이다. 그 옆에 극단 백수광부의 대표인 이성열(46) 연출가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산울림 소극장이 마련한 ‘연극연출가 대행진’의 네번째와 다섯번째 무대 <너무 놀라지 마라>(1월7일~2월1일)와 <뉴욕 안티고네>(2월5일~3월1일)를 각각 준비하고 있다. 박근형씨의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는 한마디로 황당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이면서 슬픈 코미디이다. <쥐>, <청춘예찬>, <대대손손>,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포트> 등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일상을 그려온 박근형 특유의 가족이야기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첫째 아들(김영필)은 불황기의 영화계에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워낙 시나리오가 부실한 탓에 작업이 지지부진할 뿐이다. 그의 아내(장영남)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노래방 도우미로 나선다. 어느 날 아버지(이규회)가 앙숙인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가출한 그의 아내가 소복을 입고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뒤 충격으로 유서 한통을 남기고 안방에서 목을 맨다. 그 유서 내용이 바로 “너무 놀라지 마라”이다.
아버지가 죽었지만 가족들은 장례를 치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첫째 아들은 천정에 매달린 아버지의 시신 아래에서 변함없이 시나리오 수정작업을 하고, 그의 아내는 밤이 되면 어김없이 동네 총각(김동현)이 기다리는 노래방으로 나간다. 변비에 시달리는 둘째 아들(김주완)은 시신이 썩는 냄새보다는 화장실 환풍기가 고장 났다고 투덜대며 시신 밑에서 태연하게 찬밥을 차려 먹는다. 박근형 특유의 통렬한 풍자와 해학이 느껴진다. 박근형씨는 “2008년 말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에게 닥친 부조리한 현실을 그리려고 했다”며 “현대인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삶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그는 “남들이 볼 때는 콩가루 집안이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그러자 이성열씨가 “우리 시대 아버지의 무기력한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폐기처분조차 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청춘예찬>보다 더 센 것 같다”고 거든다. 그러면서 “근형 형이 주로 매달려온 가족 중심적인 이야기가 점점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귀띔한다.
연극 <뉴욕 안티고네>는 폴란드의 수필가이자 칼럼니스트, 드라마 작가인 야누쉬 그오바츠키(70)가 소비에트연방 붕괴 뒤 제1세계 미국에 이주한 제2, 제3세계 이민자들의 환경과 삶을 냉정하게 들여다본 작품이다. <키스>, <오레스테스>, <굿모닝? 체홉!>, <물고기 축제>, <여행> 등 문제작들을 발표해온 이성열씨가 2005년 워크숍 공연으로 선보인 뒤 3년간을 벼려서 무대에 올린다.
이 연극은 뉴욕의 공원(톰킨스 스퀘어 파크)에 살고 있는 세 명의 노숙자들의 사랑과 희망, 절망을 담고 있다. 어느 날 40대 푸에르토리코 여자 아니타(정은경)는 그의 애인인 보스턴 출신의 철학자 존(강진휘)이 간밤에 얼어 죽어 뉴욕의 시체안치소에 버려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50대의 러시아 유태인 화가 사샤(김동완)와 50대 폴란드 생 양아치 벼룩(박완규)에게 시체를 찾아서 묻어달라고 부탁하지만 벼룩은 공원에 버려진 엉뚱한 시체를 파묻고는 장례비를 갈취한다. 뉴욕시 당국의 ‘공원 정화 작전’이 임박해지자 사샤는 아니타와 함께 러시아로 가려는 결심을 하고 질투심에 눈먼 벼룩은 아니타가 다른 노숙자에게 성폭행당하는 것을 방관한다.
뉴욕 경찰관 짐 머피(정만식)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관객들을 향해 노숙자들에 대한 관용과 올바른 정책 등을 이야기하면서 태연하게 ‘공원 정화 작전’을 벌인다. 공원 주위에 3미터 높이의 철제 울타리가 세워지고 공원으로 돌아가려던 아니타는 정문에 목을 맨다.
그오바츠키는 <뉴욕 안티고네> 이전에도 <바퀴벌레 사냥>(1986년)에서 정치, 경제적 사정으로 떠밀리듯 미국행을 택한 폴란드 예술가들이 뉴욕에서 이방인으로서 겪는 소외와 공포, 불안을 그렸다. 이 작품은 극단 블루 바이씨클 프로덕션(BBP)가 <잠 못 이루는 밤에>(연출 배은영·번역 김준삼)이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5월 국내 초연했다.
<뉴욕 안티고네>는 1992년 워싱턴 아레나 스테이지 극장의 요청으로 쓰여진 뒤로 프라하, 페테르부르크, 본, 예일 레퍼토리, 애틀랜타, 뉴욕, 멕시코시티, 크로아티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파리에서 공연되었다. 미국 <타임>지는 1993년 이 작품을 최고의 10대 연극으로 선정했다. <뉴욕타임스>는 “집이 없음, 그것은 머리 위에 지붕이 없는 것 그 이상의 무엇임을 그오바츠키는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영혼의 상태이다”고 평했다.
이성열씨는 “낯선 땅, 가난한 사람들의 애절한 사랑과 절망의 노래”라고 말한다. 그는 ‘뉴욕’ 이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을 상징하고, 이들 ‘노숙자들’은 이곳에 몰래 들어와 사는 ‘약소국가들의 불쌍한 백성들’이다 ”고 설명한다.
그오바츠크의 <뉴욕 안티고네>는 희랍극 <안티고네>의 대결구도를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21세기 지형도 속에서 의미 있게 재구성해 보이고 있다. 마치 희랍극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국가권력에 대항해 개인의 자유와 정의를 요구하는 싸움이라면, 그오바츠크의 <뉴욕 안티고네>는 ‘미국’ 이라는 세계의 중심에서 어깃장을 놓으며 살 권리를 주장하는 주변부 밀입국자들의 생존 투쟁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시대적인 의미와 함께, 불법체류자로 노숙을 하고 지내면서 서로에 대한 증오와 무관심뿐이던 주인공들이 어떻게 타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회복해 가는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공권력에 대항해 벌이는 소박하면서도 처절한 투쟁을 그려 보이고 싶어요.”
이성열씨는 “오늘날 한국사회는 비싼 임금 탓에 급격히 늘어난 이주노동자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면서 “인종차별을 받아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제는 인종차별을 하는 가해자가 되거나 가해자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주노동자 출신의 노숙자들의 삶을 현미경으로 바라봄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다루려고 한다”고 덧붙인다.
그는 2005년 워크숍 연습을 할 때 노숙자들의 생활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고 서울역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자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그 생활을 관찰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노숙자 무리에서도 계급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도 서로 도와주고, 마치 하나의 가족단위, 하나의 공동체 단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그러자 박근형씨가 “욕심이 나는 작품이다”며 “성열 형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소비에트 해체 이후의 동구권 사람들의 이야기를 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에 끼어있는 약소국의 끊임없는 시련이 느껴진다”고 풀이한다.
2009년 한국 연극의 앞날이 궁금했다.
박근형씨는 “무조건 연극하는 사람들이 100% 잘해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 이성열씨도 “어느 시대에나 관객들은 자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좋아한다”며 “요즘 연극인들은 자기 굴을 파고 자기 거울에서 자기 모습만 본다. 이제는 남을 보아야 한다”고 거든다. 그러면서 그는 연극의 유통에 대해서 어렵게 말을 꺼낸다.
“80~90년대는 연극하는 사람과 연극을 보는 관객과의 채널이 다양했어요. 지금은 연극과 관객이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고 작품의 판별 기준도 모호하거나 혼란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뮤지컬이나 로맨틱 코미디 연극이 판을 치면서 진지한 연극이 언론에 노출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그는 “그동안 연극인들이 너무 거대 담론시대에 익숙해져 있었다”며 “이제는 좀 더 촘촘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연출가 그룹인 ‘혜화동1번지’ 2기 동인으로 수많은 문제작을 발표해온 두 사람에게 물었다. “한국연극의 희망은 있나?”
그러자 두 사람은 “우리는 언제나 아이엠에프였다”고 웃음을 터뜨린다. 박근형씨는 “내년도 힘들겠지만 오히려 이럴 때 연극하는 사람들이 다운된 것 점검하고 정신 차려야 한다”며 “대중에 영합하는 작품들은 타격이 크겠지만 좋은 연극이 부활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성열씨도 “우리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의 눈이 더 맑아지면 연극하는 이들의 창작의욕도 생기고 그만큼 좋은 작품들과 좋은 관객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실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작품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연극은 무엇일까? “사회적인 인간을 포착해서 꿰뚫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이성열) “가족이든 사회문제이든 보기에 편하지만 그 속에 가시가 들어있어서 보고 난 뒤 불편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박근형) (02)334-5915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이민자 문제 다룬 ‘뉴욕 안티고네’ “우리는 언제나 아이엠에프 새해 사회비판적 작품 늘 것” 올해 대학로 연극판은 불황의 한파에 뮤지컬과 퍼포먼스 등 볼거리 공연의 쏠림 현상이 겹쳐 꽁꽁 얼어붙었다. 그렇다고 희망까지 접을 수는 없는 일. 세밑에 중견 연출가 박근형(45)씨가 신작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성균관대 건너편에 자리한 극단 골목길 연습실을 찾아갔다. 20평 남짓한 연습실에선 박근형씨가 담배를 잘근잘근 씹으며 배우들의 동작 점검에 한창이다. 그 옆에 극단 백수광부의 대표인 이성열(46) 연출가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산울림 소극장이 마련한 ‘연극연출가 대행진’의 네번째와 다섯번째 무대 <너무 놀라지 마라>(1월7일~2월1일)와 <뉴욕 안티고네>(2월5일~3월1일)를 각각 준비하고 있다. 박근형씨의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는 한마디로 황당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이면서 슬픈 코미디이다. <쥐>, <청춘예찬>, <대대손손>,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포트> 등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일상을 그려온 박근형 특유의 가족이야기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첫째 아들(김영필)은 불황기의 영화계에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워낙 시나리오가 부실한 탓에 작업이 지지부진할 뿐이다. 그의 아내(장영남)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노래방 도우미로 나선다. 어느 날 아버지(이규회)가 앙숙인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가출한 그의 아내가 소복을 입고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뒤 충격으로 유서 한통을 남기고 안방에서 목을 맨다. 그 유서 내용이 바로 “너무 놀라지 마라”이다.
아버지가 죽었지만 가족들은 장례를 치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첫째 아들은 천정에 매달린 아버지의 시신 아래에서 변함없이 시나리오 수정작업을 하고, 그의 아내는 밤이 되면 어김없이 동네 총각(김동현)이 기다리는 노래방으로 나간다. 변비에 시달리는 둘째 아들(김주완)은 시신이 썩는 냄새보다는 화장실 환풍기가 고장 났다고 투덜대며 시신 밑에서 태연하게 찬밥을 차려 먹는다. 박근형 특유의 통렬한 풍자와 해학이 느껴진다. 박근형씨는 “2008년 말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에게 닥친 부조리한 현실을 그리려고 했다”며 “현대인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삶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그는 “남들이 볼 때는 콩가루 집안이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그러자 이성열씨가 “우리 시대 아버지의 무기력한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폐기처분조차 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청춘예찬>보다 더 센 것 같다”고 거든다. 그러면서 “근형 형이 주로 매달려온 가족 중심적인 이야기가 점점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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