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오드리 햅번, 헤밍웨이, 피카소, 마더데레사.. 금방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20세기의 유명한 인물들. 그들을 찍어온 유서프 카쉬의 사진전이 열린다. Yousuf Karsh. 사실 난 그가 누군지 잘 모른다. 하지만 한겨레신문에 난 광고의 사진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를 전율을 느낀다.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윈스턴 처칠이 바로 앞에서 나를 쳐다보는 듯 생생한 사진.. 사진을 찍을 때 피우던 담배를 빼앗고 화를 내는 처칠을 달래어 사진을 찍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문제의 그 사진. 그렇듯 말없이 사진을 바라보다가 그래 어디서 봤나 했더니 바로 이 사진들이군. 위인전에서, 잡지에서 간혹 보게되는 사진. 물론 기억속에 희미하여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진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카쉬라는 사람이었구나.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눈앞에 있을 때 기록으로 남겨 놓아라.”
그의 스승과 같았던 존 가로의 가르침. 사진을 찍고 있는 내게도 확실한 울림을 준다.
새로 단장한 홀을 지나 강화유리계단을 거쳐 한가람미술관으로 간다.
드디어 카쉬전 오픈일. 일찌감치 예술의전당으로 향한다. 비는 내리고.
예술의 전당에 와보니 전에 없던 홀이 생겼다. 공사를 마치고 새로 단장을 한 모양이다. 예술의전당 곳곳을 가기 쉽도록 만들었는데 장식이 참 화려하다.
강화유리로 만든 계단을 올라 한가람미술관으로 간다.
카쉬의 사진을 보러 들어가 처음 본 사진은 오드리 헵번이었다. 깊은 모공, 잡티까지도 온전히 내앞에 드러내고 살포시 돌아선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 여자의 화장이 어떤 것이구나를 새삼 알려준 눈썹화장과 마스카라. 단아하고 깨끗한 그녀의 이미지 그대로 그녀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내앞에 지금 막 서있는 것이다.
보도를 위해 사진전 현장을 취재하는 사진기자들
이 사진전에 한국 사진계가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고 한다. 지난 매그넘코리아 사진전 당시 한국 사진계 원로들이 많이 불편해했다고 한다. 한국에 뿌리박고 한국을 사랑하고 사진을 찍는 한국 사진가는 외면하고, 왜 외국에서 잠깐 한국에 들어와 스치듯 사진을 찍는 외국작가들의 사진전을 그리고 크게 하는가 하는 문제제기였다고 한다. 일면 맞는 의견이고 그것은 나도 매그넘코리아전 내내 들었던 아쉬움이다. 하지만 막상 사진전을 주최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도 자본주의 시스템인데 과연 흥행이 되는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비용으로 한국 사진가들의 사진을 코리아전이라는 이름으로 주최하면 사람들이 보러 올것인가? 딜레마다. 한국의 많은 생활사진가들은 세계적으로도 그 수를 자랑할 수 없을만큼 많은 기기를 보유하고 소위 장비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만큼 카메라를 사랑한다. 문제는 이들이 사진을 사랑하는가이다. 사진을 찍는 기계에 열광하듯 사진의 내용에 대한 욕망도 강한가? 어느 사진가는 사진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사진보는 문화’가 부재하다고 한탄한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작업한 사진을 보러오는 사람이 적고 책으로 출판해도 팔리는 숫자가 적다는 것이다. 이것은 풀어가야 할 숙제일 듯 하다. 그런면에서 이번 카쉬전은 한국의 인물사진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를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임응식, 육명심, 박상훈, 임영균, 김동욱. 이들 5명의 사진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한국의 배우들, 작가들, 예술인들을 찍은 사진은 몇장뿐일지라도 친숙한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새로운 모습에 기분이 좋다. 한국 사진계가 발전하기를 기원하면서 이번 카쉬전이 지난 매그넘코리아전처럼 크게 성공하기를 바란다.
임응식, 육명심, 박상훈, 임영균, 김동욱. 사실 잘 모르는 분들이다. 하지만 사진이 이들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동욱 작가의 사진. 정일성감독의 모습이 매력적이다. 정일성, 허영만, 피천득
한국작가들의 사진을 보면서 눈에 뜨인 것은 정일성씨의 사진이다. 강렬한 눈, 확고한 신념. 야! 이 사람이 정일성이구나. 그 옆으로는 문화부장관인 유인촌씨도 있었다. 유인촌. 한 때 지적이고 단아한 모습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 그러나 정치에 뛰어든 후의 그의 행적을 보면서 다시금 젊은 날의 사진을 보니 왠지모를 고집, 남을 인정하지 않는 폐쇄적인 아집으로만 보여 여기에 싣지 않았다.
임영균 작가의 배우 사진. 화장하지 않고 수수하게 차려입은 전도연씨. 평설하기를 속옷이 살짝 비치는 그녀의 순수한 섹시미를 담았다고 한다. 원본 프린트에서는 맛이 나는데 다시 사진으로 찍으니 맛이 덜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돌아본 카쉬의 사진.
카쉬의 사진전.
카쉬가 누군인지 잘 모르던 내게, 사진전 관람 경험이 많지 않은 내게. 이 사진전의 첫 느낌은 ‘아! 이게 사진인가? 이게 사진이구나’였다.
컴퓨터 화면을 통해 또는 채에 인쇄된 사진 정도를 보고 사진에 대한 안목을 키우던 내게 정작 프린트된 원본 사진들의 감흥은 이건 도저히 말로 설명이 안되는 깊은 감동이었다. 단지 조명만으로 이렇게 인물을 표현할 수 있을까? 찍히는 대상과의 쉬임없는 교류, 이해, 그리고 그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낼 특징을 잡고 전체상을 아우르는 천재적 영감이 없다면 과연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사진의 참맛. 이 말 만큼 어울리는 표현이 또 있을까?
내가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사진. 슈바이쳐의 사진을 보는 순간 다시금 나는 숨을 참고 있었다. 한평생 의술에, 생명과 타인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헌신한 노의사. 한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어찌 한장의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꼭 감은 눈, 얼굴의 굵은 주름, 거칠어진 피부. 슈바이쳐의 눈썹이 이리도 길었던가? 하지만 내 생각뿐인가보다. 반사되는 불빛에 사진이 제대로 찍히지 않아 도록을 뒤져보지만 도록에서 슈바이쳐는 보이지 않는다. 처칠이나 잉그리드 버그만, 헤밍웨이의 사진에 눌린 것일까? 나는 이 사진이 너무도 좋은데, 어떤 사진보다도 더 감동적인데.
이건 왜이리 내 사진으로 표현이 안되는가? 내가 보고 온 사진들이 아니다. 챌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이 사진을 보노라면 조용한 선율이 흐르는 것 같다. 카쉬의 사진 중 유일한 뒷모습 사진이라는 이 사진.. 카잘스가 뒤돌아서 음악을 연주하고 벽인 듯 둥글고 검은 가림막에 살짝 보이는 창문.. 그곳에서 있는 듯 아닌 듯 빛이 새어 들어오고, 연주자의 몸위로 빛이 내려 앉는다. 빛들은 가만가만 조용히 흐르는 선율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 음악은 빛을 타고 둥글게 퍼져 마침내 작은 창문을 넘어 더 넓고 환한 세계로 흐른다. 보고 있노라면 발을 뗄 수 없고 흐르는 음악에 귀기울이게 한다. 아, 사진에 삶의 고통과 회한과 슬픔을 담아내면서 어찌 음악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진속에 음악과 예술을 넣을 수 있었던 카쉬라는 작가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마더 데레사는 말한다. 너는 가난한 자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제라도 돌아보라.
그녀, 안나 마냐니. 1958년 이탈리아 배우인 그녀를 찍은 사진 앞에서 나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 벨리시마, 황금마차 등 이탈리아 영화에서 온몸을 내던지는 강렬한 연기, 투박한 하류계급사회의 여인역을 맡아왔던 배우. 그녀를 떠올리면 늘 불행, 소아마비 아들, 슬픈 얼굴이 연상된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빈민굴에서 조부모의 손에 큰 아픔을 간직하고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자. 카쉬는 그녀에게서 ‘비극에 가까울 정도로 음침함을 내뿜는 그녀의 모습’을 찍고 싶었다고 한다. 깊게 패인 눈두덩, 담배를 쥔 손. 그녀의 슬픈 이미지를 더 음영지게 한다. 경지되고 굳어진 듯 그녀의 어깨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 우리네 이모같다.
드물게 칼라작업을 했는데 그것이 아마도 더 섹시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위와 아래의 여백이 있어 빨간 모자와 그녀의 얼굴이 더 강열하다. 그녀는 아름다워 보인다.
카쉬의 작품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의 사진에서 충분히 감동을 맛보았다. 사진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예술의 경지. 그림으로, 다른 것으로 맛볼 수 없는 그윽한 흑백의 톤, 가슴 저 밑바닥부터 심장의 고동을 끌어올리는 깊은 울림. 카쉬의 사진을 도록으로 다시 보지만 그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 ≫ ‘사회의 얼굴’이라는 부제로 1950년대 캐나다의 사회상을 담은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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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의 사진가들, 원로 사진가들, 관련 인사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오픈 기념식을 한다. 손범수씨가 사회를 보고 육명심 사진가, 이상벽씨 등이 축사를 했다.
카쉬전은 3월 4일부터 5월 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5전시관에서 열린다.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한 오리지널 빈티지프린트 사진작품을 가져와 한겨레에서 주최하여 사진전을 연다고 한다. 이 사진전에 계속 관심이 가는 것은 인물들의 강렬함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까닭이다. 그의 전시회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초상사진,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유명인사들 (정치가, 예술가, 배우, 과학자들)의 사진이 전시되고 2부는 포토저널리즘 정신으로 찍은 1950년대 캐나다의 사회상 3부는 카쉬의 초기 작업들이라고 한다.
요즘처럼 인물사진에 관심이 많은 즈음에 정말 기대가 되는 전시회이다. 아들 녀석 손잡고 가족과 지인과 함께 다시금 가봐야겠다.
카쉬전 홈페이지 :
http://www.karshkorea.com/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