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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 맥 잇는 문봉선 인터뷰
소나무·강·대지 주제 근작 30여점 전시
‘국산사군자’ 정립…전통 새롭게 계승
소나무·강·대지 주제 근작 30여점 전시
‘국산사군자’ 정립…전통 새롭게 계승
“나는 절대로 밤에 그리지 않아요. 밤 그림은 노동일 뿐 그 속에 생명이 없어요.”
지난 1일 서울 마포의 작업실에서 만난 한국화가 문봉선(48)씨는 “바람이 자는 오전 6시반부터 10시까지 이화여대에서 그려 온 것”이라며 4~5m 길이의 모란 그림 두 점을 보여주었다.
“흑백 바둑판, 또는 사계절처럼 조화를 이룰 때 그림은 완벽해집니다.”
그는 먹이 묻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 모란 줄기의 살지고 메마른 모양새 등을 가리키며 그림을 읽어주었다.
저녁볕이 역광으로 비치는 강변, 강 이쪽과 저쪽에 키 큰 수양버들이 반투명의 막처럼 서 있다. 누가 그림이 비었다고 하는가. 화폭 가득 저녁볕이다.
“2005년 인천대에서 홍대로 자리를 옮겼는데, 한강이 보이는 곳이었어요. 강이란 일상에 찌든 이들한테 숨통을 틔게 하고 평상심을 돌아보게 하지요. 촉촉하면서도 가라앉는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붓을 댄 듯 안 댄 듯한 반투명의 막은 도대체 어떻게 그릴까. 처음 시도한 방법인데, 하면서 그는 뜸을 들였다. “먹을 진하게 갈아 붓에 묻힌 다음 거의 마른 상태서 조금씩 여러 차례 붓끝을 댑니다.” 그는 평범한 소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 낸 작품들은 소나무, 강, 대지를 주제로 한 근작 30여점. 그는 얼마 전 고향 제주에 다녀왔다. 중산간이 고향인데 그곳에서 제주시까지 나오려면 4㎞ 정도를 걸어야 한다. 그 4㎞ 안에 자신이 그림 소재로 삼고 있는 것들이 다 있더라고 했다. 중학교 때 늘 보아 심상하던 그 풍경이 사실은 그의 뇌리 속에 각인돼 자양분이 된 셈이다.
“해송은 적어도 100년은 돼야 기품이 있습니다. 소나무는 그 안에 풍상과 세월을 안고 있지요.”
그의 해송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바람의 형상을 담고 있다. 거대한 둥치는 20도 정도 기울어 있고, 가지들 역시 한쪽으로 가지런하다. 백여년을 바람에 씻기어 바람에 거스르는 것은 모두 떨구어 굳이 작가가 생략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최소화한 모습이다. 작가는 짐짓 어눌한 듯한 터치로 가지 끝에 맴돌다가 걸린 바람 한 줄기를 그려낸다. 그는 해송은 품고 있는 것이 많아 한 그루만 그려도 족하다고 했다.
대지는 경남 통영 앞바다의 매물도를 다녀오면서 바다 쪽에서 통영을 바라보고 잡아낸 구도. 보통은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구도를 잡기 마련인데 그는 거꾸로 잡았다. 잔가지를 모두 쳐내고 오로지 올망졸망 먹의 굴곡만으로 원근을 나타낸 땅은 성스럽게조차 보인다. 남도의 전설이 솔솔 풀려나올 법도 하다.
그가 이처럼 낮은 풍경에 주목한 것은 높은 곳을 다 거쳤기 때문. 전통은 새롭게 이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또다른 전통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지론이다. 전통을 답습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본다. 한국화가 침체된 이면에는 생각 없음과 게으름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
그의 화력은 일종의 구도 여행이다. 1986년 나온 첫 출세작은 동대문 시장의 짐바리 자전거들. 동아미술상을 받았다. 당시 26살 패기 넘친 문봉선은 뒤엉킨 자전거들을 276×655㎝ 실물대 크기로 그려냈다. 그림을 본 한국화 대가 운보 김기창이 “누구냐”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가도로의 건설 모습, 서울 아현동·계동의 기와집 물결 등 눈길을 준 것마다 새로운 소재들은 새로운 기법을 입었다. 먹과 아크릴을 함께 쓰기도 했다. 자장면이든, 초밥이든 잘 먹고 소화를 시키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다음으로 그가 한 일은 ‘국산 사군자’ 정립하기. 전남 광양의 매화, 충남 안면도의 국화, 섬진강 대나무를 찾아가 실사를 했다. 중국의 그림 도상 교과서인 <개자원화보>에서 모두 익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남중국 풍토에서 자란 남중국인의 시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본다. 15년 동안 그 짓을 해서 책 두 권으로 묶어냈다. 괴이쩍은 행적은 그뿐이 아니다. 북한산, 설악산, 지리산도 10년 동안 화구를 짊어지고 오르내렸고, 섬진강 발원지에서 광양까지 3년에 걸쳐 주파한 끝에 22m 대작을 얻었다. 간송미술관, 리움을 찾아가 겸재 정선의 그림을 거의 다 모사했다. 대자연과 대가와 오랜 대화를 나누면서 그는 서서히 화단의 거목으로 자리잡은 것.
“보이는 것을 있는 대로 그리는 것은 하수지요.” 그가 흠뻑 빠진 것은 바람과 햇살. 나아가 그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최근 그의 그림을 보면 이미 시를 쓰고 있는 듯하다. 불어난 봄 물가에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 나귀 탄 시인묵객이 꾀꼬리를 돌아볼 법도 한데, 화선지를 펴놓은 작가의 시선만 존재한다. “문봉선표요? 아직 어림없어요. 앞으로 10년은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전 ‘동정지간-비어 있는 풍경, 또는 차 있는 풍경’전은 서울 인사동 선갤러리에서 16일까지 열린다. (02) 734-0458.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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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문봉선(48)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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