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겹살을 구울 때 쓰는 뒤집은 솥뚜껑(오른쪽), 공중전화기(왼쪽)
‘우리를 닮은 디자인’ 전, 반세기 생활 읽히네
20여년 전 모든 신문이 세로쓰기 전통을 고집할 때 과감하게 가로쓰기를 시작한 신문, 지문 컷을 걷고 블록 편집을 고안한 신문을 기억하는가. <한겨레신문>이다. 당시에는 획기적이다 못 해 불온할 정도였다.
한글 모음을 ·, ㅡ,ㅣ 세 가지로 단순화한 휴대전화 문자판 ‘천지인’. 한글 조형원리를 꿰뚫어 휴대전화에 연결시킨 회사원은 로열티 없이 월급만 받았다고 하던가. 안상수체. 500년 이상 한자의 네모틀에 갇혔던 훈민정음을 해방시킨 혁명이다.
서울 신문로 한국디자인문화재단 디플러스에서 열리는 ‘우리를 닮은 디자인’ 전에는 1950년부터 2008년 촛불문화제까지 우리네 생각과 생활을 바꾸거나 지배해온 디자인 제품 52가지가 전시되고 있다. 현장 큐레이터가 추천하고 중견 디자인 교수들이 선정했다.
언뜻 보면 ‘그것도 디자인이야?’ 하고 지나칠 것들이 상당하다. 자장면을 배달하는 철가방, 삽겹살을 구울 때 쓰는 뒤집은 솥뚜껑, 목욕탕 필수품 이태리 타월, 궁전식 예식장 등이 그것. 열린 시각으로 선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대를 읽는 재미가 무척 쏠쏠하다. 대전차 장애물, 경부고속도로, 이순신장군상, 세운상가 등은 군사·개발독재와 그 아류시대에 만들어져 우리네 의식 속에 그림자로 자리잡은 것들. 이들 대형 조형물 맞은편에 선 풀뿌리 조형물들, 즉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촛불소녀 캐릭터, ‘비더레즈(BE THE REDS)’ 등은 작고 일시적이지만 무한 복제가 가능한 게 특징이다.
아파트 보급에 따른 생활의 변화상도 읽힌다. 김치냉장고, 오리표 싱크대, 삼익쌀통 등에서 옛 부엌을 떠올릴 수 있고, 빨간 공중전화기, 마이마이 카세트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눈에 띈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 쪽은 산업적·미학적 기준보다 한국인이면 누구한테나 친근해 영향력을 미친 것들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6월6일까지. (02) 735-9672.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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