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희 개인전 ‘기억의 간격’
서윤희 개인전 ‘기억의 간격’
보라빛 운무가 가득한 봄. 보일듯 말듯 산사 처마 끝에 연등이 가득 걸렸다. 스님 서넛이 묵직한 바랑을 메고 입산을 한다. 서윤희의 <기억의 간격-춘하추동>의 내용은 분명 그렇다. 한데, 가까이 가면 산과 운무가 사실은 종이에 침착된 염료 찌꺼기임을 알게 된다.
작가는 홍차, 치자, 오미자 등의 천연재료를 섞어 만든 수제 안료에 장지를 구겨서 담근 뒤 쪄서 말리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때그때 작가가 선택한 염료, 알갱이의 크기, 장지의 구겨짐, 그리고 방치된 시간에 따라 다른 얼룩을 얻는다.
작품의 출발은 얼룩이다. 작가는 거기에서 사막, 절벽, 호수, 바닷가, 해저 등을 발견하고 그것과 관련된 자신의 기억을 투사해 최소한의 형상을 그려넣는다.
서씨는 반복 염색으로 얼룩을 만들면서, 그 얼룩에서 기억이 저장된 공간을 발견한다. 그 장소에 얽힌 소소한 기억을 되살려 아주 미세한 그림을 그리면서 반추를 거듭한다. 작품은 그런 과정의 결과물일 뿐. 작가가 암벽 등반이나 자동차 랠리를 즐긴다거나 한때 출가를 고민했다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은 기억을 휘저어 작품에 토해냄으로써 작가는 기억의 주술에서 놓여나 자유를 얻게 된다. 점점 밝아지는 작품이 증거다.
그의 작품에서 빗물이 스며든 토담의 얼룩을 떠올리는 것은 관객의 몫. 전시장에는 작가의 얼룩과 그것이 빚어낸 관객의 얼룩이 공존한다. 작품에 다가가고 떨어지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간극에는 보이지 않는 끈끈이가 생긴다. 서윤희 개인전 ‘기억의 간격’은 14일까지 갤러리현대 강남점에서 열린다.(02) 519-0800.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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