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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씨실·날실로 빚은 인류 문명의 파노라마

등록 2009-07-14 18:57

2001년 작 <이카로스 Ⅱ>. 지나친 자존심으로 불행을 자초한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를 현대적 인물상으로 재해석했다. 9·11테러, 경기침체 등의 영향을 받은 작품.
2001년 작 <이카로스 Ⅱ>. 지나친 자존심으로 불행을 자초한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를 현대적 인물상으로 재해석했다. 9·11테러, 경기침체 등의 영향을 받은 작품.
존 에릭 리스 ‘태피스트리’ 전시회
이미지의 예술은 때론 거장의 손을 타고 상식을 초월한 변신을 감행한다. 미국의 섬유 예술가 존 에릭 리스는 그 전형이다. 그는 실을 짜서 그린 그림 ‘태피스트리’를 인류 문명사의 파노라마 회화로 탈바꿈시킨다. 장식용으로 치부되는 태피스트리에 마성처럼 지성과 직관을 부린다. 씨실과 날실을 눙치는 노련한 60대 작가의 손에서 동서고금의 문명사·예술사가 빚어낸 갖가지 무늬와 이미지들이, 전쟁과 불황으로 척박해진 21세기의 음울한 디스토피아와 함께 피어오른다.

중세 유럽 조각서 9·11테러까지
방대한 소재에 한번 놀라고
손으로 짜넣은 색감에 또 놀라
“문화적 산물 재해석 능력 압권”

금속성 실이 한땀 한땀 빚어낸 2차원 태피스트리의 평면 위에 오버랩된 리스의 이미지들은 동서 문화 예술을 막 넘나든다. 그만큼 현란하며 모호하다. 밀랍 날개가 녹아 하늘에서 떨어져 죽은 슬픈 이카로스, 익살과 공포가 갈마드는 티베트 해골들의 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풍자한 거대한 폭탄 덩이들, 일본 에도시대 남녀의 질펀한 섹스가 펼쳐지는 춘화 등이 재킷 의상, 승려 가사 형태의 화폭 위에서 거침없이 스멀거리고 있다. 문명사를 횡단하는 광활한 상상력과 사고의 활력을 천에 짜낸 이 작가의 정체는 무엇인가.


2000년 작 <플라밍고>. 발에 목을 감은 홍학의 명쾌한 형상과 색조는 19세기 공예운동가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 형식에 바탕한 것이다.
2000년 작 <플라밍고>. 발에 목을 감은 홍학의 명쾌한 형상과 색조는 19세기 공예운동가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 형식에 바탕한 것이다.
6월 초부터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박물관이 마련한 리스의 전시회 ‘근원으로서의 세계’는 최소한 두 번의 놀라움을 안겨준다. 그 첫째는 소재의 방대함이다. 작업의 모태인 고대 페루, 북미 인디언의 원시 직물 디자인은 중세·르네상스·바로크 유럽 조각사의 기념비적 도상들과 중국·티베트의 호랑이, 명상적 도상들과 아취 속에 어울린다. 그 사이사이로 9·11테러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 흑백 갈등 등을 은유한 폭탄, 흑백 뒤섞인 얼굴 등을 새겨넣은 현대미술 취향의 작품들이 있다. 바로크 거장 카노바의 미끈한 남성 조각상을 재현한 작품에는 현대 젊은이들의 문신과 털을 발라놓았다.

두 번째 놀라움은 생동하는 형상들이 오롯이 수백 수천의 날실과 씨실을 일일이 손으로 짜넣으며 만들어낸 색감과 형상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회화적 사실성과 매끈한 디자인적 요소들은 문화사를 넘나드는 통찰과 직관, 테크닉을 통해 아우러져 있다. 국내외 여느 섬유 예술전에서도 보지 못했던 파천황적인 작품 얼개, 태피스트리 작가가 흔히 지닌 장식 취향에 매몰되지 않고, 회화·설치 작가를 능가하는 입체적 표현의 힘과 세부의 개성이 작품 전면을 빛낸다.

리스의 독창적 작업은 시카고 미대 시절 남미 페루와 고대 인디언 문화의 직물 예술을 눈에 익히며 습작한 경험에 바탕한 것이다. 그는 타고난 여행가다. 페루·북미의 고대 유적들을 두루 섭렵했고, 유럽의 르네상스와 19세기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 산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견문과 인문적 탐구를 몸으로 체험하며 작업해왔다. 2000년대 초엔 티베트에도 머무르면서, 비전된 의학서와 승려 가사, 의식구 등의 문양들을 빨아들였다. 홍경아 학예사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흡수한 여러 문화적 산물들을 자기 세계로 만들어내는 재해석 능력이 단연 압권”이라고 했다.


지난 6월 일주일간 한국에 머물렀던 작가는 서울 인사동, 동대문 시장, 박물관 등을 둘러보고 갔다. 갓끈의 말총머리 같은 우리 전통 직물 재료의 색다른 물성에 빠졌다는 그는 지금 한국 체험의 영감을 소재로 또다른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워싱턴 텍스타일 박물관의 도움으로 성사된 이 특별한 전시는 8월14일까지다. (02)710-9134.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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