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연도’서 혼합문화 흔적을 보다
문영민 개인전 ‘간격’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죽은 이의 기일에 독특한 추모 기도문인 ‘연도’를 낭송한다. 마치 판소리 등의 민속 가락 같은 음률로 지금은 사라진 구어체로 나눠 읊조리는 이 기도문은 18세기 전래된 서구 가톨릭 예식이 우리 전통문화와 만나 빚어낸 특유의 산물이다.
서울 통의동 전시공간 팩토리에 차려진 재미작가 문영민씨의 개인전 ‘간격’(15일까지)은 문화교배의 대상물인 천주교 ‘연도’를 뜯어본다. ‘~리이다’ ‘용약케 하시고…’ 등의 낯선 옛 구어체에 히브리·라틴어 고유명사와 지명, 성인·성녀 이름들이 접목된 연도의 기도문구들과 문구 일부분을 짜깁기한 이미지(사진)들을 수채화 등으로 옮겼다. 연도를 읊는 경건한 발성을 따로 떼어내 접붙인 분절 사운드 작업도 들려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연도’의 이미지와 소리들은 우리 안에 뿌리 내린 혼성 문화 전통의 흔적들이다. 천주교 집안에서 어린 시절 멋모르고 읊어온 기도문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된 작가는 종교적 맥락을 배제하고, 기도문 문구와 낭송음에 담긴 이종교배의 양상을 냉정히 투시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유교적 제사 문화와 라틴 제례가 낯설게 만나 매끄럽게 융화된 혼성 문화의 기묘한 양상을 예술의 눈으로 재발견하는 셈이다.
여성 신자들이 쓰는 미사보의 유래에 대한 각양각색의 답변을 담은 설문 조사 출력 작업도 흥미롭다. 미사보의 연원이 여성의 과시욕과 남성 응시에 대한 억압에서 비롯됐다는 성서 내용과 판이하기 때문이다. 전시는 우리가 세계 속에서 순수 별종으로 살 수는 없다는 숙명을 엄숙하게 드러낸다. (02)733-4883.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