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주행’ 택한 지휘자 길버트
[리뷰] 뉴욕 필하모닉 내한공연
노거장 로린 마젤에 이어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이 선택한 지휘자는 이제 불혹을 지난 앨런 길버트였다. 지난 12, 1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 뉴욕 필 내한 공연의 최대 관심사는 이런 세대교체가 167년 전통의 악단에 가져올 효과였다.
건장한 체구의 길버트는 인파이터 복서요, 정통파 투수였다. 부지런한 비팅(박자를 젓는 손짓)으로 땀 흘리는 그의 해석은 건강했지만, 내면의 격정이나 분노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12일. 뉴욕 필이 한국 초연으로 선보인 망누스 린드베리의 곡 <엑스포>는 북적대면서 중첩되고 폭발하는, 회화적인 현대음악이었다. 작곡가 야나체크를 연상시키는 불안감과 백열적인 에너지의 표현이 일품이었다. 뒤이어 가을 분위기 물씬 풍기는 와인빛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최예은이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그의 해석은 시적이었다. 자의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개성을 갖춘 연주였다. 뉴욕 필의 입체적인 반주와 함께 늘 듣지 못했던 새로움이 비로소 귀에 들어왔다.
베토벤 <교향곡 7번>에서 뉴욕 필의 연주는 칸타빌레(노래하듯이)의 궤도를 정속 주행하는 열차를 연상시켰다. 길버트 차장에겐 모험보다 안전이 중요해 보였다. 첫날 앙코르는 훌륭했다. 멘델스존의 <스케르초>에서 유현한 맛을 풍기더니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에서, 지휘자는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아가는 빛과 어둠의 조도를 비로소 제대로 맞추고 있었다.
13일. 명실공히 세계 최고 기량의 프랑크 페터 치머만이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연주는 치머만의 베스트에 속하지는 못할 것 같다. 1, 2악장에서 성기고 거친 음색과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종종 노출했다. 3악장에서는 특유의 응집력이 살아나면서 벅찬 피날레를 장식했다. 앙코르로는 파가니니의 <‘주께서 왕을 구하셨도다’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했다. 지난해 서울시향과 펼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 때 앙코르로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경이로움은 친근함으로 변해 있었다.
100년 전인 1909년, 말러는 뉴욕 필 상임지휘자로 부임했다. 불혹의 길버트에게 대선배의 작품이 부담으로 다가갔기 때문일까. 말러의 <교향곡 1번>은 3악장까지 지루하고 온건했다. 4악장에 이르러서야 관악 주자들이 단단한 총주를 제대로 냈다.
길버트는 모험과 혁명을 유보한 온건파였다. 뉴욕 필 단원으로 앉아 있는 어머니(바이올리니스트 다케베 요코)까지 휘어잡을 카리스마는 보여주지 못했다. 큰 공연일수록 지켜지지 않는 청중의 매너는 여전한 과제였다. 휴대폰 벨소리와 기침 소리, 가방 여닫는 소리 등이 단원들과 솔리스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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