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소멸과 생성, 혼돈…낯설고 기묘한 풍경

등록 2009-10-19 18:42수정 2009-10-19 19:00

공간의례-피와 뼈 2009.
공간의례-피와 뼈 2009.
지용현 ‘혼돈의 새벽’ 전
마흔살 첫 개인전…오랜 절치부심 화폭에 담아
생전 처음 보는 그림들이다. 멀리 초록색 우주의 하늘이 보이는 행성. 용암이 폭발해 뚜껑이 날아간 듯 뻐끔뻐끔하게 구멍이 뚫린 터전. 땅과 바다와 하늘을 뒤덮었던 온갖 길짐승, 날짐승, 물고기들은 뼈다귀가 되어 질펀하게 흩어져 있다. 오랫동안 그들의 살에서 나와 고였던 피가 파이프를 통해 다시금 뼈다귀의 땅에 흘러내린다. 그 피는 삼엽충의 후손인 듯한, 혹은 겉씨식물의 씨앗인 듯한 구형체들의 기운이 되어 양서류인 듯, 파충류인 듯한 생명체로 뿜어져 나온다.

‘혼돈의 새벽’이란 제목으로 서울 사간동 유엔시 갤러리에서 여는 지용현(41)씨의 개인전에 걸린 ‘공간의례-피와 뼈’의 모습이다. 작가는 이를 풍경화라고 했다. 듣도 보도 못한 것이기에 ‘00이다’라기보다 ‘00인 듯하다’로 말할 수밖에 없는 기묘한 풍광이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 11점은 모두 창세 이전, 혹은 심판의 날 이후의 혼돈을 그린 점묘화. 그곳은 게걸스럽게 지구의 자원을 낭비한 생명체들이 소멸하고, 그 생명체들이 몸을 의탁했던 중력이 소멸되어 시간과 공간이 혼돈돼 있는 가운데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그것은 필시 인간보다 선한 생물체이지 않을까.


공간의례-강변 2009.
공간의례-강변 2009.
작가 지씨는 그림만큼이나 미술판에서 낯선 작가. 1996년 경원대를 졸업하고 서울 독산동 지하 달셋방에서 작품을 그렸다. 물감이 떨어지면 뮤지컬·방송의 배경막 등을 그렸지만 머릿속 그림을 화폭에 옮길 만큼 벌이가 충분하지 않았다. 2005년 경기도 안성의 농가 주택을 1000만원 전세로 들어가 주거비를 최소화하고 나서 캔버스 앞에 진득하니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절치부심 10년 만에 여는 첫 개인전. 창고에 가득 쌓인 작품들 가운데 11점을 골라내어 걺으로써 마흔이면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내놓으리라는 자부심도 동시에 걸었다.

그의 작품은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뮈스 보스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보스가 보여주는 세계가 선과 악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중세 정치, 종교계의 세속적 욕구를 조롱하고 있다면 지씨의 것은 보스가 경험하지 못한 신화들과, 블랙홀 등의 과학적 지식들, 다가오는 새날을 지향하는 희구로 가득 차 있다.

그가 “내 작품은 이렇다”라고 말하기보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파스칼이 감명 깊었음을 이야기한 것은 그의 작의가 자신의 정신 활동이나 심상을 표현했기 때문일 터이다.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인간에게서 거대 우주와 미립자 세계를 본 그들처럼. 어쩌면 독산동 지하 셋방에서 경험한 한없는 추락과, 안성의 밝은 전원에서 본 끝없는 상승을 동시에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화랑의 비위를 맞춰 꽃 그림을 그리는 풍토가 만연한 가운데서 지씨는 희소한 존재다. 오랜 각고 끝에 노련한 붓질 실력은 물론 자기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나서 비로소 “나 여기 있소”라고 명함을 내미는 작가가 어디 흔한가. 아쉽다면 화폭이 너무 어둡다는 것. 어두운 세상이 작가의 내면조차 어둡게 만든 것은 아닌지 저어된다. 11월5일까지. (02)723-2711.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