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산책-산 2009
채성필 흙그림전
빙하의 끝이 그럴까. 만년설이 중력의 무게로 대지를 쓰다듬고 지나간 자리. 굳은 모만 남은 바위들이 등성이를 이루고 그 사이에 무른 모에서 깎인 모래 알갱이가 세월처럼 고였다. 작가 채성필씨의 작품은 그 앞에 선 관객을 사람은 물론 동물의 자취가 미치지 않은 히말라야의 어느 골짝으로 데려간다. 가까이 다가가면 무슨 조화 속인가 의아함으로 작가를 찾게 만든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그렸소?
작가는 수백 년에 걸친 자연의 풍화와 충적을 캔버스에서 재연한다. 그의 색채는 대지에서 비롯한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땅에서 얻은 다양한 빛깔의 흙을 풀어 고운 입자가 부유하는 물에서 물감을 얻는 것. 캔버스에 은분을 넓게 발라 흰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물감을 떨궈 굳히면 요철이 된다. 그리고 다시 묽은 물감을 뿌린 뒤 캔버스를 흔들어 세우고 기울이면 물감은 흐르는 물이 되고 요철은 바위가 된다. 그런 과정을 일곱 차례 정도 되풀이하게 되면 캔버스는 수백 년 풍화와 충적을 되풀이한 땅의 거죽을 형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흘림으로 다 못한 이야기는 잔 붓질로 마무리한다고 작가는 귀띔한다.
유기질이 거세된 흙 물감은 인공의 요란한 색과 거리가 먼 누르딩딩한 것 일색. 하지만 그것은 은분의 흰색과 대조되면서 선명한 채도를 얻는다.
흙물은 작가의 손길에서 상상력을 얻어 골짝을 갈라 쏟아지는 폭포가 되고, 안개 낀 가을빛 울울삼림이 된다. 세월이 충적한 먹빛 동양 산수화가 유럽 어딘가로 건너가 그곳 옷으로 바꿔 입은 모양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로 나아가 그곳의 흙으로써 먹을 대신하여 안료를 얻고 그곳의 풍광을 재현했다. 작가의 터치는 붓이 아닌 몸으로 이뤄진 것. 흩뿌리고 흔들어 세워 흘려서 터럭과 먼지 등 모든 인위의 것을 공간에서 배제하기 위해 작가는 벌거벗은 몸이 되어야 했다. 그의 흙그림전은 서울 평창동 갤러리 세줄에서 11월22일까지 열린다. (02)391-9171.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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