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다윈의 거북이’
연극 ‘다윈의 거북이’
‘거북이보다 못한’ 지식인
야만적 유럽현대사 풍자
‘거북이보다 못한’ 지식인
야만적 유럽현대사 풍자
저명한 역사학 교수의 집에 기이한 모습의 곱사등이 할머니가 불쑥 찾아온다. 이 할머니는 교수가 쓴 <유럽현대사> 두 권을 읽어보았노라며 책이 오류들로 가득 차 있더라고 장광설을 시작한다.
1894년 프랑스 군인 드레퓌스 사건 때 재판정에서 우는 그의 모습을 보았고,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 1937년 독일군의 스페인 게르니카 폭격 때도 거기(현장)에 있었으며, 1944년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 1985년 옛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등의 현장도 다 봤다고 주장한다. 또한 프랑스 파리의 싸구려 술집에서 마르크스를 만났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우승한 ‘일본선수 손’(손기정)에게 히틀러가 “죽 쒀서 개 줬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들려준다. 교수가 할머니를 치매 걸린 늙은이로 취급하자 그는 자신이 ‘다윈의 거북’이라고 털어놓는다.
서울시극단이 11월1일까지 세종엠씨어터에서 공연중인 연극 <다윈의 거북이>는 인간으로 진화한 다윈의 거북이 ‘헤리엇’이 유럽 현대사의 이면을 들춰내는 블랙코미디다. “인간이야말로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고 믿고 진화한 거북이 ‘헤리엇’이 정작 목격한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의 역사였다. 그의 증언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다. “과연 인간은 진화하고 있는가?”, “극도로 발달한 과학과 문명은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작품에 등장한 거북이 ‘헤리엇’은 진화론 창시자 찰스 다윈이 1835년 연구를 위해 갈라파고스 섬에서 데려왔던 거북 세 마리 중 한 마리다.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44)는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동물원에서 ‘헤리엇’이 175살로 숨졌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헤리엇이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이 희곡을 썼다.
늙은 거북이로 변신한 강애심(전 서울시극단 단원)씨의 연기는 발군이다. 굽은 등에 헝클어진 머리칼과 주름진 얼굴, 번뜩이는 눈, 불안한 듯 들쑥거리는 목 등 영락없는 늙은 거북 인간을 연상시킨다. 관객들은 우스꽝스런 연기에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그가 고발하는 부끄러운 역사에 침묵한다. 특히 자신을 이용하려는 역사학 교수와 그 부인 베티, 의사 등이 독이 든 케이크를 먹고 죽어가는 장면에서 헤리엇이 던지는 말은 섬뜩한 메시지로 가슴을 울린다. “당신들을 통해 많이 배웠어요…. 퇴화 이론. 어느 순간이 되면 인간은 짐승 수준으로 퇴화한다는 그 이론.”
‘헤리엇’이 털어놓는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머릿속에 잠재된 서양 역사의 지식을 퍼즐처럼 짜맞추는 지적 유희도 연극 보기의 또다른 즐거움. 연출가 김동현(44)씨는 ‘너무나 인간적인 거북이 인간’과 ‘거북이보다 못한 인간’의 대결이란 설정으로 웃음 코드를 잃지 않았다. 조명으로 장소와 시간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무대 기법은 군더더기 없이 세련된 느낌이다. 교수 역의 강신구, 베티 역의 강지은, 의사 역 김신기 등 단원들의 연기도 극 흐름에 잘 녹아 있다. (02)399-1114~6.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서울시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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