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인 1937년 조선 경성의 종로거리에 있는 천변살롱에는 예술가와 룸펜과 ‘모던 보이’와 ‘모단 걸’들이 드나들었다. 마담 언니 카츄사가 젊은 모던 보이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떠난 뒤 단골들의 발길이 주춤했지만 ‘웨이츄레스’ 박모단이 마담으로 나서면서 살롱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아코디언 반주의 코믹하면서도 애달픈 노랫가락이 살롱 밖으로 비집고 나와 네온싸인 밤거리를 흥건하게 적시곤 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머, 오빠는 심술쟁이야, 머/ 난 몰라 난몰라 내 반찬 다 뺏어먹는 거/ 난 물라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고/ 오이니 콩나물만 나한테 주구/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
살롱을 들어서면 막 노래를 끝낸 박모단이 버스터 키튼 모자와 해롤드 로이드 안경을 낀 모던 보이에게 다가가 실없는 수작을 거는 모습이 보인다. “그냥 쌀롱 문 닫고, 결혼이나 해버릴까? 저 어때요? 미안하지만, 내 타이프는 아니예요!”
1930년대 코믹한 가사와 음악으로 인기를 끌었던 대중가요 ‘만요(漫謠)’를 독특하게 음악극으로 옮긴 <천변살롱>(연출 김서룡)이 12~15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무대에 오른다. 지난해 콘서트 <천변풍경1930>의 대미를 장식했던 이 작품을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씨와 박현향 작가가 대본을 맡고 하림밴드가 음악을 맡아 새롭게 꾸몄다. ‘오빠는 풍각쟁이’(작사 박영호, 작곡 이용준, 노래 남일연), ‘엉터리 대학생’(작사 콜롬비아 문예부, 노래 김장미) 등 당시 억압된 식민지 사회를 뒤틀어 풍자하는 만요 17곡을 라이브밴드 연주로 만난다.
“제 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얼핏 얼핏 듣던 옛날 노래인데다, 맛깔스럽게 불러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또 제 이름이 전면에 나서기 때문에 큰 짐을 짊어진 것 같아서 처음에는 두렵고 부담이 되었어요. 그렇지만 연습을 하면서 이렇게 좋은 곡들을 제가 부를 수 있는 게 영광이고 기분 좋아졌어요.”
영화와 뮤지컬 무대를 누비고 있는 배우 박준면(33)씨가 22살 어린 살롱마담으로 변신했다. 그는 “옛날 음원으로 노래를 익히고 있는데 이번에 가수 고 이난영(1916~1965)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며 “이난영이 부른 ‘해수욕장 풍경’ ‘다방의 푸른 꿈’은 처음 들어보았는데도 노래가 기가 막히더라”고 웃었다. 2008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가창력과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는 가난한 꿈 많은 시골처녀, 유랑극단 배우, 명월관 기생 추월이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낸다. 무용가 최승희(1911~1969)가 부른 ‘이태리의 정원’를 비롯해 미스 리갈의 ‘신접살이 풍경’, 김해송의 ‘모던기생 점고’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희귀한 만요를 그의 시원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여기에 나와 있는 곡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옛날 빅밴드 재즈가 들어 있고, 초창기 재즈가 여과없이 들어온 곡들이라 제가 해왔던 작품과 유사한 것이 있어서 편하더라구요. 15곡을 제가 라이브로 소화해야 하는데 여태까지 제가 뮤지컬에서 보여주었던 파워풀한 가창력은 아니지만 재미나게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어떻게 하면 간드러질까 고민하고 있다”며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통으로 소리를 뽑았다면 이번에는 가사들을 재미있게 풀고 소리를 잘 배합해야 할 것 같다”며 “관객들이 이 공연을 보고 ‘술 한잔 먹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가게 만들면 성공한 것 같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박모단은 난생 처음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고 따라 나섰으나 얼마 후 극단이 해체되고 오갈 데가 없어지자 진고개의 유명한 기생 명월이의 밑으로 들어간다. 그는 천변을 거닐다 재즈에 이끌려 춤에 빠지게 되고 명월관을 나와 모더니스트가 모이는 천변살롱에 취직을 하게 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가수와 영화배우의 꿈을 키운다. 그러던 중 운명의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극의 줄거리.
이번 무대에는 앨범 <다중인격자>와 <휘슬 인 어 메이즈>로 젊은 층의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 하림(33)씨도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음악감독으로 참여한다. 특히 그는 극중 박모단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 악사이자 작곡가로 연기하면서 아코디언 연주도 맡아 피아노, 기타, 콘트라베이스, 바이올린으로 짜여진 5인조 어쿠스틱 ‘살롱밴드’와 함께 연주도 들려준다. 만요 마니아인 그가 부르는 ‘개고기 주사’와 박준면과 두엣곡 ‘활동사진 강짜’는 이번 공연의 가장 큰 볼거리.
“스페인과 그리스, 아일랜드 등을 여행하면서 근대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그리스의 경우 1920~30년대 ‘렘베티카’라는 음악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젊은이들이 그것을 부르는 것이 유행이 되었어요. 그래서 4~5년 전부터 우리 근대음악을 구해서 듣다가 라디오 방송에서 프로젝트로 연주하고 그랬어요. 그것을 뮤직웰의 우은정 대표가 방송을 듣고 두산아트센터와 함께 작품을 꾸며보자고 제의해와 공연이 이뤄진 거죠.”
하림씨는 “여행을 다니면서 근대음악이 굉장히 힘을 갖고 있는 나라들을 보면 부럽더라”며 “이 프로젝트와 별개로 근대음악을 많이 찾아서 부르고 다니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천변살롱을 계기로 사람들이 근대음악에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좋겠다”며 “내년에는 할 수 있다면 브라스밴드를 갖춰 공연을 꾸미고 싶다”고 기대감을 밝혔다.
<천변살롱>에는 당시의 인기높은 ‘경성 늬우스’가 소개되며 30년대 중반 경성의 거리 모습과 야경, 해수욕장 풍경 등 흥미로운 자료들이 슬라이드로 소개된다. (02)708-5001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두산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