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의 <디스 차밍 맨>(1983년)
[세상을 바꾼 노래 103] 스미스의 <디스 차밍 맨>(1983년)
1990년대 이래의 대중음악계에 나타난 가장 흥미로운 의미의 전화 사례는 ‘인디’(인디펜던트)와 ‘얼터너티브’라는 개념의 용례 변화·분화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주류에의) 대안’이라는 포괄적 에토스의 범주로 우선했던 각각이, 구체적 스타일을 가리키는 장르의 의미로 파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폭제는 물론, 너바나의 성공이었다. 인디가 메이저로 진출하고 얼터너티브가 메인스트림을 장악하는 현상이 불붙은 결과, 인디 록과 얼터너티브 록의 음악적 특이점에 대한 논의가 대두했고 그것은 다시 음악사적 맥락에 소급적용 되었던 것이다.
비평가 웬디 포나로는 태도의 측면에서 인디와 얼터너티브가 공유하던 동질성이 장르의 측면에서 어떻게 이질화하는지를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얼터너티브 록은 주로 미국 밴드들의 “신경질적이고 무거운 사운드”인 반면에 인디 록은 영국 밴드들의 “좀더 화성적인 팝 사운드”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는 1980년대 중반 영미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가 각기 독자적으로 행보하는 가운데 분기하기 시작했는데, 그 지점에서 일종의 이정표 구실을 수행한 것이 바로 맨체스터 출신의 4인조 밴드 스미스였다. 얼터너티브 록이 당대 대중음악의 전위이던 하드코어 펑크에서 진화한 것이었다면, 인디 록은 스미스의 난데없는 등장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이 “진정한 불멸성을 지닌 80년대의 유일한 밴드”(닉 켄트)이며, “(아르이엠과 함께) 당대 가장 중요한 두 밴드 가운데 하나”(사이먼 레이놀즈)라는 상찬을 아끼지 않았던 연원이다.
불과 5년 남짓 단출한 기간을 활동했을 뿐인 스미스가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을 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전사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 독창적인 개성이었다. 밴드 이름부터가 그렇다. 오케스트럴 매누버스 인 더 다크, 시그 시그 스푸트니크 따위 장황한 작명의 유행을 거스르고자, 그들은 “가장 평범한 이름”이라는 이유로 스미스를 택했다. 현란한 색채와 과장된 장식이 패션을 지배하던 시절에 1950년대 스타일을 고집한 감각이나, 당대의 필수품목과도 같았던 신시사이저와 뮤직비디오를 경원한 태도는 또 어떤가. 스미스는 논리의 모순과 모순의 논리 사이 경계에서 자존과 자학으로 돌출한 스핑크스였다.
밴드의 중추이며 각각 작곡과 작사를 전담한, 기타리스트 조니 마와 보컬리스트 모리시의 경이로운 파트너십도 마찬가지다. 온갖 실험을 마다하지 않는 가운데 명료하게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의 규범을 세운 조니 마와 오스카 와일드식 언어유희에다 이류영화의 대사들을 병치하여 카리스마적 모호함의 시구를 써낸 모리시의 결합은, 유례없이 기이한 시너지를 뿜어냈고 그 자체로 인디 록의 원형질이 되었다. 그러므로 ‘디스 차밍 맨’의 가치는 스미스 최초의 히트곡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족하다고 할 것이다. 포스트 펑크의 딜레탕트와 뉴웨이브의 키치 사이에서 “인디의 시대적 개념을 정의한 노래”(스티븐 트라우스)였기 때문이다. 음악전문지 <모조>가 이 노래를 ‘영국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인디 레코드’로 꼽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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