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 샘에 고인 말’
연극 ‘그 샘에 고인 말’
어느 철거촌 비극적 가족사
절제된 연출로 잔잔한 울림
어느 철거촌 비극적 가족사
절제된 연출로 잔잔한 울림
흔히 철거민들의 이야기라면 용역업체와 공권력에 대한 철거민들의 사투를 예상하게 된다. 생계와 생사를 담보로 삼는 철거민 투쟁은 최고조의 갈등을 다룰 수 있는 연극적 소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철거민의 고민이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화제의 연극 <그 샘에 고인 말>(16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은 철거민들이 주인공이지만, 다루는 이야기는 그들 안의 비극적 가족사다.
배경은 아파트 개발 지역으로 지정돼 모두 떠나고 두 가구만 남은 한 시골 촌락. 주인공은 고부간인 귀례 할멈과 진주댁. 진주댁은 40년 동안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시어머니를 봉양해온 효부 중의 효부. 연극은 방송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피디가 마을을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피디가 찾아온 목적은 효부인 진주댁의 선행을 찍어 소개하려는 의도지만, 사실 이는 귀례 할멈의 계획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할멈은 철거 뒤, 며느리가 이사를 가며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계획이 며느리를 방송 출연시키는 것. 자신들 이야기가 전국에 방송되면 며느리가 자신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진주댁의 걱정은 훗날 가출한 남편이 돌아오고자 했을 때 새집을 찾아오지 못할까, 그뿐이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극은 행방이 묘연했던, 생사조차 불분명했던 남편의 흔적을 알려 준다. 가출한 남편은 이미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지금 병환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 뒤이어 아들의 생사 여부마저 모른다고 발뺌하던 시어머니가 실은 아들의 행방을 알고 있었으며, 그동안 땅을 팔아 뒷바라지까지 해줬다는 반전. 이 모든 진실이 드러나자 40년간 남편을 기다려 온 진주댁은 울분을 토하게 되는데….
<그 샘에…>의 주인공 이연규, 천정하씨는 물론, 배수현, 염혜란, 이미지씨 등의 내공 있는 배우들은 철거를 앞둔 빈민의 비릿한, 그러나 정겨운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냈다.
전박찬, 서미영씨는 작은 촌락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샘의 정령으로 등장해 극에 환상의 층위를 더했다. 사실성과 환상성의 결합이 가정 비극으로 끝날 뻔했던 극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연출자는 올해 김상열 연극상을 수상한 ‘극단 코끼리만보’를 만든 김동현씨. 평론가들이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한 <하얀 앵두> <다윈의 거북이> 등도 연출한 김씨는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에서 보여준, 넘치지 않는 절제를 통해 과도한 격정을 경계하고 있다.
절제가 일으키는 작은 떨림은 격정적 해일보다 오랜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김씨가 연출한 또다른 연극 <눈 속을 걸어서>도 31일까지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중이다. (070)8116-7690.
김일송 <씬플레이빌> 편집장 ilsong@sceneclub.com, 사진 극단 코끼리맘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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