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샤콘’에 영혼을 붓다
[리뷰] 엘렌 그리모 첫 내한무대
지난 13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프랑스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의 첫 내한 무대는 2009년 가장 기대되는 연주회로 관심을 끌었다. 클래식 공연 기획사들이 6~7년 전부터 공을 들였던 그리모의 내한은 그가 만 40이 된 올해 비로소 성사됐다.
수수한 블랙 시스루 상의와 바지 차림으로 등장한 그리모는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첫 곡인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C단조 BWV847>은 전주곡의 경쾌한 속도감과 푸가의 신비감이 2천여 객석 주위를 가득 채웠다. 전주곡과 <푸가 BWV849·875>에서 물 흐르듯 유려한 프레이징(쉼표를 찍듯 곡 속 음의 흐름을 섬세하게 갈라 연주하는 것)을 선보인 그리모는 종종 저음역의 연주를 대담하게 가져가기도 했다. 거기에는 온갖 티끌과 부조리를 감싸 안는 듯한 모성의 포용력이 느껴졌다.
부조니가 편곡한 바흐의 <‘샤콘’ BWV1004> 연주가 이어질 때까지 그리모는 피아노에서 한 번도 일어서지 않았다. ‘샤콘’은 연주회의 백미였다. 그리모는 이 곡에서 경건한 기도 같은 장면을 연출하더니 내재된 에너지를 발현시켜 피아노 건반에서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듯 엄청난 스케일을 오고가는 핑거링(현악·건반악기의 손가락 놀림)을 구사했다. 음의 색채와 셈여림의 조절을 치밀하면서도 뚜렷하게 가져간 그리모의 바흐는 조종이 울리듯 정연한 피날레로 끝났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환희와 고통이 함께한 바흐였다. 요컨대 그리모는 바흐의 이 곡 안에 하나의 세계를 담아냈다. 아기자기함이 잘 드러난 <전주곡>과 <푸가 BWV889>, 리스트가 편곡한 <전주곡>과 <푸가 C단조 BWV543>의 압도적인 연주로 1부가 끝났다.
푸가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 있던 2부, 첫 곡인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30번>은 특히 3악장의 수수께끼 같은 서정성을 하나하나 파헤치는 그리모의 연주가 현묘하게 느껴졌다. 청중들은 바흐의 대위법(둘 이상의 독립적 선율을 조화롭게 결합시키는 작곡 기법)이 베토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역력히 비교할 수 있었다. 라흐마니노프가 편곡한 바흐의 <전주곡 E장조 BWV1006>은 약동하는 음이 시퍼런 파도같이 부서져서 물방울이 날리는 듯했다. 앙코르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인 <에튀드 타블로 Op.33> 중 2번, 9번, 3번. 바흐로 시작된 피아노의 역사적 흐름이 급류를 타고 흘러내리는 생생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객석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김준희씨는 그리모의 연주를 “아름답고 신비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신비한 여운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그리모는 내공이 느껴지는 진정한 아티스트였다.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크레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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