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에이드의 <두 데이 노 이츠 크리스마스?>(1984년)
[세상을 바꾼 노래 108] 밴드 에이드의 <두 데이 노 이츠 크리스마스?>(1984년)
비평가 앤서니 디커티스는 1980년대를 ‘김미(Gimme) 디케이드’라고 칭했다. 1970년대를 ‘미 디케이드’라 이르는 데 빗대어, 당대가 “무자비한 천박과 탐욕”의 시기였다고 비꼰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디커티스는 1980년 겨울의 두 사건-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과 존 레넌의 피살이 향후 10년의 “정조와 태도를 투사하는 렌즈”로서 “상징성의 무게를 지닌” 일이었다고 되짚었다. 실제로 그랬다. 레넌의 이상주의가 스러지고 레이건의 신자유주의가 솟아오른 그때로부터, 냉전의 기운은 우주로까지 뻗어나갔고 물질/소비주의는 극에 달했다. 소외된 세상을 향한 사상 최대의 자선활동이 이 시기에 이뤄진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는 지구상에서 지옥과 가장 근접한 곳이다.” 1984년 11월, 영국 <비비시>(BBC)가 전세계에 타전한 에티오피아의 기아 참상은 동시대인들을 충격과 비탄으로 몰아넣었다. 내전에 지친 땅에 가뭄이 내습하여 600만명이 아사 직전에 놓였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는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지원을 끊어버린 서방의 대응이 끔찍한 파국의 소실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방송을 접하고 “무력감에 분노한” 밥 겔도프는 뮤지션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레코드를 팔아 수익금을 기부하는 것이었다.
뉴웨이브 밴드 붐타운 래츠의 리더였던 겔도프는 친구인 미지 유어(울트라복스)와 함께 작업에 착수했다. 겔도프가 글을 쓰고 유어가 곡을 붙인 노래 ‘두 데이 노 이츠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더 큰 효과를 내리라고 판단한 두 사람은 동료 뮤지션들을 설득하는 한편, 방송에 출연해 여론의 지지를 끌어냈다. 그런 노력의 소산으로 밴드 에이드가 출범했다. 폴 매카트니, 데이비드 보위, 필 콜린스, 스팅, 조지 마이클, 듀란듀란, 바나나라마, 컬처 클럽 등 영국·아일랜드 출신의 당대 인기 밴드·뮤지션 40여명이 참여한 초유의 슈퍼그룹. 목표는 하나였다.
밴드 에이드는 1984년 11월25일, 24시간 연속 녹음 세션을 거쳐 ‘…이츠 크리스마스?’를 완성시켰다. 반응은 놀라웠다. 발매와 동시에 영국 차트 1위로 올라선 이 노래는 5주 동안 정상의 자리를 고수했고, 300만장 이상 팔려나가며 영국 음악사상 최다판매 싱글로 우뚝 섰다(엘턴 존의 ‘캔들 인 더 윈드 1997’이 발매되기 전까지 최고 기록). 지구촌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엄청난 기금이 답지했다.
‘…이츠 크리스마스?’는 뮤지션의 사회적 활동에 새로운 표준을 제시한 전범으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노래의 형식을 좇은 자선음반으로 ‘위 아 더 월드’와 ‘티어스 아 낫 이너프’ 등이 제작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대중음악사상 최대의 단일 이벤트”인 ‘라이브 에이드’ 콘서트가 기획되었다. 뒷날 ‘밴드 에이드 2’(1989)와 ‘밴드 에이드 20’(2004)의 이름으로 재녹음되어 각각의 버전이 모두 차트 정상에 오르는 진기록을 남기며 성탄절의 신고전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이츠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세상을 바꿔놓았다. 그때 거기부터 지금 여기까지,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이념의 차이를 빌미로 재앙의 위험을 외면하는 정치 권력의 비인간성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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