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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미술의 눈 ‘범죄 소비사회’를 흘겨보다

등록 2010-01-06 14:06수정 2010-01-06 14:07

작가 박정원이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왜곡해 그린 몽타주들.
작가 박정원이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왜곡해 그린 몽타주들.
평범한 사람들의 범죄기질 엿보고
사진·그림으로 사회적 모순 비판
작가들 “전시 끝나면 태우고픈 심정”
발단은 영화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흉악범 지강헌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던 전시기획자 김상우씨에게 실마리가 떠올랐다. 범죄에 대한 미술, 미술로 바라본 범죄 전시회였다. 범죄 보도와 범죄 영화가 넘쳐나지만 그 이면의 사회적 모순과 맥락은 사라지고 범죄를 1회성 오락처럼 소비하는 것을 전시로 말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작가를 모아 범죄 토론을 벌여가며 준비한 끝에 아이디어는 2년 만에 실제 전시로 탄생했다. 이름하여 ‘죄악의 시대’전. 31일까지 서울 홍대 앞 대안공간 루프(02-3141-1377)에서 열린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먼저 맞는 작품은 ‘서울특별시 범죄지도’다. 바닥에 깔린 서울시 지도 곳곳의 연쇄살인 현장에 사건 횟수를 뜻하는 빨간 스티커를 붙였다. 유독 스티커가 집중된 곳은 아직도 소름 끼치는 그 이름 유영철이 날뛰었던 현장. 눈을 제 높이로 올리면 사진들이 보인다. 현장을 작가 강홍구씨가 찍은 사진들이다. 중간에는 웬 개 한마리 독사진 같은 것들도 있다. 실제 현장과 가상 현장의 사진들을 일부러 섞었다.

그 옆 구석엔 덩그러니 책상이 놓였고 스탠드 조명 아래 책 한권이 있다. ‘연쇄살인범 케이(K)’의 범죄일기다.

피해자를 물색한 과정부터 실제 범행까지 꼼꼼하게 타자로 쳐서 오려 붙인 노트가 장편소설 두께다. 권력이 자기를 몰래 감시한다고 믿는 K, 공책 주인인 가상의 연쇄살인범이 바로 작가 정윤석씨가 만들어낸 진짜 작품이다.

사진가 노순택이 용산참사 현장에서 포착한 어린 철거용역 깡패의 뒷모습.
사진가 노순택이 용산참사 현장에서 포착한 어린 철거용역 깡패의 뒷모습.

예술가들이 어떻게 우리 시대의 범죄를 포착하고, 그 범죄를 작품으로 다루었는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독특한 전시는 보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날카로운 질문에 계속 허를 찔리게 된다. 당신은 죄로부터 자유로운가, 도대체 죄라는 것은 무엇이냐고 작품들이 물어대는 탓이다.

작가 박정원씨는 자신의 고교 졸업 앨범 속 동기들을 범죄수사용 몽타주풍으로 그렸다. 하나같이 어딘가 범상찮은 범죄자풍 얼굴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 숨긴 범죄적 기질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왜곡해 그린 것이다. “사회적 규정에 따라 죄인 것과 아닌 것으로 나뉠 뿐, 인간 본질 속엔 모두 죄의식이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림 속 얼굴들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진가 노순택씨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주민들을 윽박지르던 한 어린 철거용역 깡패의 뒷모습을 찍었다. 근육질도 아니고 용 문신도 없지만 묘하게 폼재는 팔 모습에서 건달패 특유의 느낌이 전해져 오는데, 거들먹거리는 자세와 역광 속에서 생생한 팔의 솜털이 이질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성희 사진가는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현장검증 장면을 담았다. 줄지어 서고 나무 위에 올라가 구경하는 사람들 모습을 통해 범죄가 볼거리가 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작가들은 범죄의 무거운 사회적 의미를 표현하면서도 작품 자체에 담기는 창조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범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였다가 다시 표현해내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고 말한다.

정윤석씨는 힘들게 만든 K의 범죄일기를 전시가 끝나면 태워버릴까 고민중이다. 배우들이 영화가 끝나도 배역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운 것처럼 가상이나마 범죄자가 되었던 기억이 너무 힘들어서다. “잠시나마 살인범이 되어보니 범죄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살인자들과 어느 순간 운명이 갈렸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작업은 그런 점에서 참 ‘나쁜’ 작업이었어요.”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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