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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전쟁 속에서도 반짝인 ‘예술의 힘’

등록 2010-03-09 19:49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연극이 밥 먹여주냐?” 궁핍했던 시절 연극 지망생들이 흔히 듣는 소리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점령된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 우지체를 찾은 유랑극단도 그랬다. 배우들이 프리드리히 실러의 비극 <도적떼> 공연을 준비하려고 하자 주민들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다. “세르비아 절반이 초상집인데 저것들이 연극을 한다니!” “당신들도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걸 알고는 있겠지?” 배우들이 “전쟁 중이라고 예술까지도 그만두어야 하나?”고 반문하지만 돌아오는 건 “염치도 없군”이라는 빈정거림과 위협뿐이다.

지난 5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연극, 더 나아가 예술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세르비아의 국민작가이자 시인 류보미르 시모비치(75)가 1975년 발표하고 1985년 유고국립극장에서 초연되어 이듬해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뛰어난 극작가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인 스테리야상을 받은 작품이다.

1943년 찌는 듯한 여름날에 나치에 점령된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 우지체.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나가고 남은 사람들은 여자와 술주정뱅이, 독일점령군과 앞잡이뿐인 이곳에 배우 네 명으로 이뤄진 떠돌이 극단 쇼팔로비치 일행이 찾아온다.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는 전쟁 중에 극단이 연극을 하겠다고 하자 마을 주민들은 비난을 퍼붓고, 심지어 젊은 여배우는 머리를 깎힌다. 독일군도 소품인 나무칼을 흉기라고 우기고 연극이 대중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고 협박한다.

그러나 예술의 힘은 냉혹한 현실에 개입하면서 빛을 낸다. 삶과 연극을 구별하지 못하는 젊은 필립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엘렉트라>의 연기로 연극의 힘을 보여준다. 그는 마을 주민 기나의 아들 세쿨라가 독일군사령관과 정부를 살해한 혐의로 독일군에게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살인현장에서 나무칼을 뽑아들고 “내 오른팔로 저들을 단숨에 무찔렀지”라는 대사를 외친다. 그는 생애 마지막을 장식한 실감나는 연기 탓에 살인범으로 몰려 총살을 당하고 세쿨라는 무죄로 풀려난다. 또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던 사형집행인 드로바츠는 유랑극단 여배우 소피아의 ‘약초꾼 연기’에 넘어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목을 맨다. 마을 주민들이 비웃던 연극적 상상력이 현실에서 가장 유용한 힘을 발휘하는 기막힌 반전이다.

물질만능과 경제논리가 판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연극은 유효한가? 작가는 극단장 바실리예 쇼팔로비치와 필립 트르나바츠의 대화를 빌어 답한다.

필립 “배우로서 지금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예술을 가지고 무엇을 실현하고,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바실리예 “난 사람들이 인생을 이해하도록 돕고 싶네. 또한 사람들이 그 인생을 잊을 수 있도록 돕고 싶지!”

그러자 필립이 소리 높여 외친다. “우리가 양을 모피로, 곰을 털모자로, 돼지를 부츠로 둔갑시키는 이 세상에서 만약에 네가 하지 않으면, 그 누가 모피 코트가 양의 울음소리를 내도록, 털모자가 곰의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도록, 부츠가 새끼 돼지를 낳도록 할 것인가?”

자칫 무겁고 지루할 수 있는 극의 흐름을 그리스 극의 코러스를 곁들인 음악극으로 생동감 있게 풀어낸 이병훈씨의 연출력이 돋보였다. 김명수(바실리예 단장), 정나진(필립), 박호석(기나), 김현웅(드로바츠), 이정미(옐리사베타) 등 40대 중견배우들의 연기는 힘차고 안정감 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음악을 맡았던 정재일이 작곡과 음악감독에 참여한 라이브 연주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28일까지. 1644-2003.

정상영 기자, 사진 명동예술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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