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오페라 연출가 피에르 루이지 피치(80)는 세계 오페라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해박한 해석과 절묘한 무대 분할, 호화롭고 풍성한 무대의상, 환상적인 색채와 조명으로 최고의 오페라 무대를 반세기 넘도록 지키고 있다.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살아생전 그를 만날 때는 허리를 굽혀서 그의 반지에 입을 맞추며 존경을 표시했다.
무대·소품까지 손수 디자인
오페라의 ‘미다스 손’ 불려
“충무아트홀 직접 보고 낙점”
거장 루이지 피치가 비발디의 오라토리오 <유디트의 승리>를 오페라로 연출해 한국무대에서 세계 초연한다. 한국오페라단(단장 박기현)과 충무아트홀(사장 박민호)이 공동제작에 참여해 오는 4월5~7일 충무아트홀 개관 5주년 기념무대로 대극장에 올린다.
“오페라 <유디트의 승리>의 가치는 유럽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너무나 훌륭한 걸작이기 때문에 선택했습니다. 이 오페라를 한국에서 공연한다는 것은 한국 관객에게는 바로크 전문 성악가들의 노래로 바로크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루이지 피치는 서면 인터뷰에서 “한국 공연 후에 내년 여름 마체레타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할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성직자 마테오 리치가 동양과의 친밀한 문화교류를 시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고 한국 초연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유디트의 승리>는 기원전 2세기 고대 아시리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자 남편을 잃은 미모의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술에 취하게 한 뒤 목을 베어 민족을 지켜낸 여성 영웅담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렬한 여인 중 한 명인 유디트의 모습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화에서 황금빛 모자이크 장식을 배경으로 남자의 잘린 머리를 들고 알듯 말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사계>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가 이 여인을 주인공으로 오라토리오 <유디트의 승리>를 작곡하고 라코포 카세티가 대본을 꾸며 17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초연했다. 루이지 피치는 무대 장치와 연기 없이 악보를 보고 부르는 비발디의 이 종교극음악을 오페라로 옮긴다.
바로크 오페라에 정통한 피치 연출의 세계 초연작을 오페라의 고장인 유럽무대가 아닌 한국에서, 그것도 오페라 전용극장이 아닌 충무아트홀일까? 피치는 1200∼1300석의 충무아트홀이 바로크 오페라를 위한 최적의 공간이라며 직접 장소를 확인한 뒤 낙점했다고 한다.
“완벽한 무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의 많은 극장을 그리고 그들이 제공해 주는 공간을 이용해 무대연출가의 능력으로 이상적인 무대로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존재합니다.”
지난 50년간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에서 500편이 넘는 오페라를 연출한 피치는 오페라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1951년 무대감독으로 출발한 그는 거장 루카 론코니와 공동작업을 해오다 1977년 이탈리아 투린에서 모차르트 <돈 조반니> 연출을 맡으면서 독립했다. 특히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연출은 물론 무대, 의상, 소품, 심지어 마지막 커튼콜까지 모든 것을 손수 디자인하는 ‘피치 스타일’로 유명하다. 따라서 <유디트의 승리> 한국무대에도 무대의상과 세트 모두가 로마 티렐리 아틀리에서 만들어져 공수된다.
오페라 평론가 유형종씨는 “오페라 연출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피치가 만드는 만큼, 종교적인 오라토리오의 특성상 비발디의 원작에서는 배제된 관능미가 되살아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추천했다.
<유디트의 승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자 피치는 “자유를 위해 조국을 지키려는 유디트의 애국심”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홀로페르네스의 종인 바고아(소프라노)가 주인의 시체를 발견하는 순간을 꼽았다. “그의 처절함은 비발디의 음악과 드라마가 서로 충돌하면서 표현됩니다. 아마도 대사, 음악, 드라마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아리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치는 2007년 5월 바로크 오페라인 헨델의 <리날도>를 들고 한국을 방문한 이후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투란도트> 등을 화려하고 독특한 연출로 잇따라 선보이며 한국 오페라 관객을 사로잡았다. 특히 그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젓가락과 김치를 사랑하고 개량한복을 즐겨 입으며 한방 침술과 찜질방을 즐기기도 한다.
“한국 방문은 한국의 더 다양한 곳을 방문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한 매력적인 곳입니다. 2007년 한국 방문 때 남쪽에 있는 오래된 사찰을 간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국은 항상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 해주었습니다.”
그는 “오페라 <유디트의 승리>에 한국 관객들이 환호해 주길 희망하며. 2개의 오페라를 더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유디트의 승리>는 다른 바로크 오페라와 달리 아리아뿐만 아니라 합창이 적절히 섞여 풍성한 음악을 접할 수 있다. 또한 모두 여성 가수 5명이 나와 라틴어로 노래를 부른다. 주인공 유디트 역과 적장 홀로페르네스 역은 각각 이탈리아 메조 소프라노 티치아나 카라로와 메리 엘렌 네시가 맡아 여성 알토인 콘트랄토 목소리로 영웅적인 남성을 표현한다. 루이지 피치의 후계자로 꼽히는 오페라 연출가 마시모 가스파론이 협력 연출로 참여하고, 조반니 바티스타 리곤이 지휘하는 바로크 실내악 단체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이 반주를 맡는다.
피치는 5월과 11월에도 한국오페라단이 올릴 로시니의 <세미라미데>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등을 연출할 계획이다. (02)587-1950.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한국오페라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