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 트로트를 대표하는 가수인 장윤정(왼쪽)과 박현빈.
영국에서 활동하는 헝가리 태생의 사회학자 프랭크 퓨레디는 그의 책,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의 6장에서 “문화는 이제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나 적합한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탄식한다. 날카로운 지적을 담은 그의 말은 그러나 일면 틀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리 시대의 문화는 대중을 여섯 살짜리 아이로 만드는 문화다. 프로그램의 수준을 낮추고, 그것을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대중들을 거기에 끼워 맞추는 문화다. 그러면서 ‘재미’라는 코드로 모든 것을 포획하고자 한다. 이때 배제되는 대상은 진정성이다. 지루하며 대중을 아동으로 만드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3초 안에 웃기든가 말초적 자극을 주든가
놀랍게도 그 전위에는 대중음악이 있다. 이를 몰랐다면 유행가의 가사에 잠시만 귀를 기울여 보면 알 수 있다. “그녀의 다리는 멋져, 10점 만점에 10점 / 몸매는 에스라인, 얼굴은 브이라인, 아주 그냥 죽여줘요.” 이것이 현재 대중음악이 지향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말해주는 증좌다.
3초 안에 웃기든가 자극을 주어야 하고, 대중의 역치를 최대한 낮출 수 있을 만큼 말초적인 인상을 남겨야 한다. 또한 그에 반응하는 것이 “나는 힙하다”고 여기게끔 만들어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진정성을 논한다? 사업하지 말자는 얘기다.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제 이 바닥의 모든 종사자들이 이행해야 할 매니페스토다. 그래서 위선과 가식도 필수적이다. 더욱 진지함은 폐기처분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우연히 TV를 보았다. 버라이어티 쇼였다. 열심히 노래를 불러야 할 가수들의 현란한 입담이 좌중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날의 쇼는 다분히 의도적인 가학 개그로 시작해 더 의도적인 노래 망가뜨리기로 끝을 맺었다. 퓨레디가 한국의 TV를 보았다면 분명 책의 제목을 바꾸려고 했을 것이다.
나는 TV를 껐다. 조용한 방에 들어와 밥 딜런의 [Modern Times]를 플레이어에 얹었다. 2010년도에 흘러나오는 밥 딜런이라니. 이 형용모순과도 같은 상황. 그런데 기이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이 고집쟁이 영감은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음악과 사랑, 그리고 보헤미안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노인을 위한 나라도 없는 마당에 이 노인은 왜 이렇듯 무거운 테마에 집착하는가. 그에게 묻고 싶었다. 진정성이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이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러나 그는 ‘현 시대(Modern Times)’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트랙 ‘말하지 않겠어(Ain’t Talking)’로 답할 뿐이다.
그래, 차라리 밥값이라도?
그래. 밥 딜런이라도 대답할 순 없겠지. 가수에게 음악보다 버라이어티를 강요하는 시대. 깊이 있는 사유보다 거짓 웃음을 강요하는 시대에 대해 그 누가 입을 열 수 있겠는가. 모두가 예능인이 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못하면 침묵을 지켜야 하는 시대. 그것이 이 시대가 강요하는 계몽이다.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와 별반 차이점이 없다. 가수에게, 대중에게 여섯 살짜리의 지능을 강요하는 문화 파시즘. 평균성, 하향평준화, 참치캔과도 같이 만들어진 감수성들. 하루만 지나도 뱉은 것을 후회할 의미 없는 잡담들이 흐르고 상대에 대한 습자지 같은 호기심만이 맴돈다. “너는 누구인가”를 묻기보다는 “너는 재미있는가”를 묻는 문화 속에서 그 어디에도 진정성은 없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앞날을 보라고. 고용은 위태롭고,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그대로라고. 일상 자체가 올무라고. 누구든 좋으니까 우리를 재미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런 것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말이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음악은 당신의 봉급에 대해 관심이 없다. 음악은 당신의 질척한 일상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한다. 음악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끊임없이 내상과 외상을 입히는 이 리바이어던과 같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 음악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건가.
따라서 존 레논은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 몽상가다. 우리는 지금 ‘이매진’할 힘조차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걸 인정한다면 음악(음악인)은 우리를 재미있게라도, 그래서 비루한 놈의 일상,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라도 해야 “밥값 했다”는 소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차라리 밥값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당신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음악이 고작 밥값 정도 하는 천덕꾸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슬플 것 같다. 음악만 할 수 있다면 평생 70만 원만 받아도 좋겠다는 후배 친구 녀석의 반은 순진하고 반은 치기 어린 다짐이 겨우 그 정도의 값어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말하지 못하겠다. 음악이란 녀석이 그런 자식이었다면 나는 결코 이 글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죽기 직전까지 노래한 에디트 피아프, 처음으로 어머니와 음악적 교점을 찾게 만들어준 조용필, 가장 조곤조곤한 언어로 가장 큰 감동을 주조해낸 조니 미첼. 세상은 이들에 의해 조금은 더 아름다워지지 않았을까. 이들의 진정성이 그립다. 당신과 나를 울렸고, 때로는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던 그 노래들은 대체 어디로 가 버렸을까.
이경준
※ 이경준=정부의 실용주의 노선과 역행하게도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밥먹기 위해 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친다. 음악듣기를 제외하고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일은 독서이다. 현재 각종 잡지에 음악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지인들과 함께 철학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헤겔, 슬라보예 지젝, 자크 라캉, 알렌카 주판치치 등을 공부하고 있다. 좋은 음악을 듣고 글쓸 때 제일 행복하다.
밥 딜런 앨범.
에디트 피아프 앨범.
이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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