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에게 풍경화는 영원한 로망이다. 16~17세기 바로크 시대 네덜란드 화가들이 이 장르를 새롭게 발견한 이래 시공간을 읽는 나침반으로서 풍경화는 끊임 없는 탐구 대상이었다. 극사실적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라는 시장 논리가 판치는 지금 한국 미술판에서도 자기 시선으로 투영한 풍경을 그리는 작가들의 붓질은 계속되어 왔다. 최근 서울 북촌 화랑가에서 끊임없이 풍경을 되새김하는 소장 작가들의 작품을 잇따라 만날 수 있다.
중견작가 김보중씨는 집, 놀이터 같은 뻔한 일상 공간에서 심상치 않은 미술 풍경을 끄집어올린다. 서울 관훈동 나무 화랑에 차린 개인전 ‘일상- 그 흐름 위를 달리다’(18일까지·02-722-7760)의 작품들은 작가가 사는 서울 개포동 아파트와 경기도 용인 작업실 부근 숲의 흔한 정경 등을 냉랭하게 그렸다. 하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즉흥적인 기억과 생각들이 기묘한 회색, 황색빛 톤으로 스며들면서 추상화처럼 낯선 이미지로 땜질된 아파트 옥상 바닥과 놀이터의 괴기스러운 황톳빛 야경을 만들어냈다. 기획자 김진하씨는 “뻔한 그리기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새 풍경을 빚어내는 회화의 가능성 보여주기”라고 풀이했다.
후배 작가 황세준씨의 일상 풍경은 훨씬 꿈결같은 분위기에 젖어있다. 서울 화동 갤러리 플랜트에 차린 개인전 ‘OHOHH’(26일까지·02-722-2826)의 출품작들은 작가의 집과 북촌의 궁궐, 생활 공간들을 몽상의 바다에 띄워 올린다. 삶의 의지를 ‘애욕’으로 명명한 작가는 자신의 욕망과 정서를 푸석한 덩어리(<애욕>)로 빚어내거나, 온통 푸른 새벽빛에 휩싸인 선창가 술집의 지극히 낯선 풍경(<데자뷔>), 허연 화염 속에 싸인 전통 집의 모습(<불과 얼음>) 등으로 표현한다. 이전 전시의 일상 풍경보다 더욱 얇은 층으로 색조를 입히고 인물, 공간의 윤곽도 대폭 덜어내고 추상화시킨 작가는 “최소한의 묘사로 최대한의 묘사를 얻는 모순을 좇는다”고 말한다. 최근 더욱 자기 세계로 고립되는 듯한 황씨의 그림은 소통성의 회복이란 과제를 남긴다.
꿈과 뒤섞인 풍경은 서울 소격동 갤러리 현대 16번지에서 열리고 있는 재미동포 출신 써니킴의 개인전(12일까지·02-519-0846)에서도 엿보인다. 작가는 중2 때 이민간 기억을 붙들고 옛 학창시절 부스러질듯한 풍경들을 회색빛 감도는 여러겹의 물감층 터치로 풀어낸다. 어디선가 본듯한 교실 내 반바지 학생들과 수학여행 정경, 옛 보도사진에 따온 라이트 켠 군용트럭들의 이동 행렬이 기묘한 기억의 착시를 일으킨다.
독일에서 유학한 젊은 작가 이만나씨는 풍경 자체를 낯선 재료로 간주한다. 서울 통의동 브레인팩토리에서 열고 있는 그의 첫 국내 개인전인 ‘깊이 있는 표면’(9일까지·02-725-9520)은 벽에 걸친 넝쿨과 숲 등의 식물 풍경을 재해석한다. 면벽 수행하듯 낯설게 자연을 바라본 시선을 목탄 드로잉과 물감을 흩뿌려 쌓는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불가사의한 자연 풍경을 펼쳐낸다. “풍경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정제된 감각, 서정성이 조화를 이룬”(기획자 고원석) 수작들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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