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박 아시아관에 나온 신안 침몰선 유물인 원나라 때의 찻잎 담긴 항아리. 중국의 홍당요 가마에서 만든 것이다.
서울국립박물관 잇단 기획전
‘좁은공간 급조한 전시’ 아쉬워
‘좁은공간 급조한 전시’ 아쉬워
요즘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은 관객보다 전시들로 북새통이다. 지난달 거의 매주마다 새 전시들이 막을 올렸다. 크고 작은 특별전·주제전 5건이 잇따랐다. 아시아 최대 관객에 ‘올인’한 최광식 관장의 물량 전략에 따른 것이다. 볼거리는 늘었지만, 상당수 급조된 탓에, 콘텐츠 면에서 후한 평가를 주기 어렵다는 지적이 따른다.
전시 성찬의 핵심은 기획전시실의 문명전 ‘그리스의 신과 인간’(8월29일까지·유료)이다. 그리스인들의 자유분방한 섹스와 초연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당시 도기·조각들이 흥미진진한 볼거리다. 한 여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풀처럼 쑥쑥 자라는 남근 밭에 물을 주는 그림이 단연 눈길을 붙잡는다. 기원전 400년대 항아리에 그린 이 이미지는 익살스러운 성적 상상력의 한 경지를 보여준다. 여자 젖가슴 모양새에다, 젖꼭지 굽을 잡는 기원전 5세기께의 술잔은 욕정처럼 내용물을 전부 비우기 전에 내려놓을 수 없다. 취흥이 올라 여성 노예의 섹스 시중을 받는 남자를 그린 술잔, 사슴·새를 선물로 주면서 구애하는 남자 동성애 3쌍의 도자기 그림 등도 보인다. 살점 떨어진 주검을 새겨놓고 그가 아름다운 청년인지, 상스러운 인물인지 어떻게 분간할 것이냐고 새긴 대리석 묘비의 부조는 죽음 앞에 누구나 하잘것없다는 깨달음을 던진다. 영국박물관(브리티시 뮤지엄)의 소장품 136점을 보여주는 순회전. 제우스, 헤라 등 그리스 주요 신상과 원반 던지는 사람 등의 유명한 스포츠 조각들도 구경할 수 있다.
상설관 특별전시실엔 ‘청동기 시대의 마을풍경’(7월4일까지)전이 기다린다. 농경 중심으로 계급 사회가 형성됐던 이땅의 청동기 시대 마을과 생활상을 모형과 토기, 농사도구, 칼, 바위 그림 등을 통해 보여준다. 또 4일부터 개편된 3층 아시아관은 1970년대 전남 신안 해저에서 발견된 원나라 침몰선의 중국 명품 도자기들을 현지 가마 생산지별로 전시하며 중국 도자기 역사를 길라잡이한다. 침몰선 도자기 산지가 경덕진 등 5곳 가마 외에 7곳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차와 도자기 문화를 기록한 옛 문헌과 비교분석하는 성과도 거뒀지만, 좁은 공간에 급조해 충실히 내용을 살리지 못했다는 평이다. 고고관 테마전 ‘6세기 신라를 보는 열쇠-문자’(6월20일까지)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와 화랑들의 공부 맹세를 담은 ‘임신서기석’, ‘영일 냉수리비’의 실물, 국내 최고 신라비인 ‘포항 중성리비’ 복제품 등을 내놓았다. 역시 비좁은 전시장 한구석에 명품 비석들만 늘어놓고 안에 깃든 풍성한 이야기는 풀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02)2077-9000.
글·사진 노형석 기자
망자의 주검이 새겨진 고대 그리스의 대리석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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