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후져 보이지만 살갑고 애잔한 풍경

등록 2010-08-16 22:19

사진작가 염중호씨의 <무릉스피커>.
사진작가 염중호씨의 <무릉스피커>.
3인3색 ‘무릉기행’전

염중호 `익숙한 부조화’ 앵글 맞춰
서동욱 `용도 폐기 뒷골목’ 화폭에
유비호 `여행 재해석’ 특이한 영상

2010년 한국 땅에도 과연 ‘무릉도원’이 있을까? 지방 곳곳을 돌다보면 그 비슷함 직한 뭔가가 있진 않을까? 지난 3월 어느 날 밤 사진작가 염중호씨는 동료 화가 서동욱씨와 술을 마시다가 뜬금없이 이런 아이디어를 꺼냈다.

복숭아꽃 피는 낙원이란 뜻의 무릉도원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이상향이다. 4~5세기 낙향한 중국 시인 도연명이 쓴 시 <도화원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하지만 두 작가 머릿속엔 딴 속내가 있었다. 개발 바람에 묻힌 지방 소도시와 시골 구석구석의 풍경을 날것 그대로 잡아내고 싶다는 욕망, 그 허접한 풍경에서 생생한 영감을 얻고 싶다는 야망이었다. 생각이 꽂히자 거침없이 짐을 꾸렸다. 영상설치작가 유비호씨도 합세했다. 각자의 무릉도원을 마음에 품고 3~6월 여행을 떠났다. 먼저 의정부, 철원 찍고 안동, 순천, 여수를 거쳐 부여, 공주에서 여정을 갈무리했다.

곳곳의 절, 항구, 시골길, 도시 뒷골목 등을 뒤졌다. 감 잡긴 했지만, 여정에서 무릉도원은 없었다. 대신 안동에서 무릉유원지를 발견했고, 소도시·시골의 버려진 공간들만 잔뜩 눈에 안겼다. 찌는 듯한 밀양의 더위도 잊을 수 없었다. 그래도 허접한 그 풍경들이 내심 찡하게 와닿았다. 스케치하고 렌즈를 돌려 부지런히 찍고 또 그렸다.

밀양 뒷골목 풍경을 그린 서동욱씨의 그림 <밀양  33℃ 겨울>.
밀양 뒷골목 풍경을 그린 서동욱씨의 그림 <밀양 33℃ 겨울>.


8월, 어느새 전시장에 그들 작품이 내걸리게 됐다. 서울 한남동 공간 해밀톤에 차려진 ‘무릉기행’전(8월21일까지, www.spacehamilton.com)은 세 작가의 3인3색 여행 기록이다. 후텁지근하고 끈끈한 대기감이 살갗에 달라붙는 이태원 뒷골목의 거친 창고터 전시장 분위기부터 이 전시의 얼개와 찰떡처럼 들어맞는다.

리더 격인 염중호씨의 사진들은 절과 지방 유원지, 시골길 등에서 보았던 현대와 전통의 모순된 풍경들을 유머를 담아 포착한다. 5월 초파일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의 고색창연한 단청과 공포 아래에서 작가는 어울리지 않게 계단에 놓여진 붉은색 싸구려 카페트를 함께 포착한다. 80년대풍 무릉 유원지의 기암괴석 절벽은 언뜻 장쾌해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절벽 중간에 싸구려 음악을 틀어대는 확성기가 나무에 걸려 있다. 순천 가는 길의 시골길 전봇대는 전깃줄에 강제로 끌려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는 모양새로 앵글에 잡혔다. 염씨는 “전통과 개발, 키치 등이 만나 부조화스러운 시골 풍경들이 되레 더 익숙하게 자리잡은 지금 우리의 시각적 현실 자체를 그냥 던지고 싶었다”고 말한다.

소도시의 방치된 뒷골목 풍경들을 그린 동료 서동욱씨의 그림들은 강퍅한 화폭 이면에 애잔한 감상이 흐른다. 30도를 넘는 무더위에 헉헉거리며 돌아다녔던 밀양의 뒷골목이나 폐업 10년이 넘은 여수의 폐양어장 건물, 여수 돌산도 안의 버려진 편의점 건물 등을 담은 그림들이 그렇다. 용도폐기된 채 생기를 잃어버린 옛 공간에서 작가는 유난스런 애착과 영감을 느끼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유비호씨의 <모빌 파라다이스>. 일상 풍경을 휴가지 같은 비일상적 풍경으로 변환시키는 투시경 도구들을 담은 함 모양의 설치작품이다.
유비호씨의 <모빌 파라다이스>. 일상 풍경을 휴가지 같은 비일상적 풍경으로 변환시키는 투시경 도구들을 담은 함 모양의 설치작품이다.

가장 튀는 건 유비호 작가다. 두 작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테크놀로지적, 개념적 작업으로 여행을 재해석한다. 안동 병산서원 앞 낙동강변을 찍은 사진 40여장을 자갈이 가득 깔린 전시장에 붙은 좁은 창고공간의 벽에 가득 잇대어 붙여놓고, 그 공간을 리모컨으로 조종되는 모니터 장난감 자동차가 달리게 한다. 관객들은 차를 조종하면서 사진들을 탐색하는 동영상을 체험한다. 공간의 내력과 의미보다 낯선 여행 자체의 형식을 뒤틀어보고 탐구한 셈이다.

출품작들은 한국 현대 도시 공간의 살풍경한 성격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다큐적 시선에서 슬쩍 비켜서 있다. 판이하게 다른 세 작가의 개성과 관점으로 지금 우리의 속된 풍경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점이 살갑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후져 보여도 이 땅 구석구석엔 뜻밖의 낯선 에너지와 친밀감이 깃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