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전 ‘싱가포르의 혼란’
‘아시아 리얼리즘’전 걸작들
2010.7.27-10.10 덕수궁미술관
2010.7.27-10.10 덕수궁미술관
곧 폭풍우라도 몰아칠 듯한 하늘. 먹구름이 끼고 숲가로 바람이 휭하게 분다. 심상치 않은 날씨 속에 풀숲 어귀에 젊은이들이 불안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무리 사이에서 한 청년이 책을 들고 선동하듯 손짓으로 이야기한다. 자세히 보니 책은 말레이 역사책. 그들은 말레이 반도의 끝 싱가포르에 정착한 중국 화교의 후손들이다. 앞으로 독립국의 국민으로 살려면 말레이의 풍토와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청년의 열변을 듣는 젊은이들의 공통된 절박감이 그들의 서로 다른 표정과 몸짓을 꿰뚫고 있다.
화교 출신 싱가포르 작가 추아미아티가 그린 이 그림은 1955년 싱가포르가 아직 영국 식민지일 당시 현지 청년들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중국에서 태어나 6살 때 싱가포르로 건너와 성장한 그는 1950년대 적도 미술협회 창립 멤버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성격의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 또한 반식민지 성향의 중국계 청년들이 독립을 앞두고 말레이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재현했다. 작가는 사진처럼 재현하는 리얼리즘 미학에 강렬한 매력을 느꼈던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린 1955년 싱가포르인들은 말레이 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는 것을 갈망했기 때문에 말레이어 공부 붐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1957년 독립한 말레이 연방에 편입됐다가 1965년 사실상 축출돼 재독립한 싱가포르는 영어를 주된 언어로 삼아 국가 정체성을 180도 바꿔버린다. 그림은 초창기 국가 정체성을 놓고 혼란을 거듭하던 싱가포르인들의 어려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기록화인 셈이다. 작가는 60년대 이후 그림 이력을 바꿔 대통령 등 주요 정부인사의 초상화가로 활약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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