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 김명수(56)씨
재미 춤꾼 김명수씨 26년만에 고국 공연
아리랑 열두고개 걸친 다양한 굿춤 선봬
아리랑 열두고개 걸친 다양한 굿춤 선봬
26년 만에 고국무대의 춤 공연을 손꼽아 기다리던 재미 무용가 김명수(56)씨는 최근 한 지인으로부터 속상한 말을 듣고 맥이 빠졌다. 한국에서는 춤 공연은 안 되니까 인맥을 동원하고 초대권을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지인은 공짜라도 와준 것만 해도 고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오랜 타향살이에서 제에게 남은 것은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데 공짜 표로 공연하라는 것은 저더러 몸을 팔라는 말입니다. 기가 막혀서 며칠 간 연습을 할 마음이 생기지 않더군요. 제가 어떻게 마련한 공연인데 반드시 춤꾼의 자존심을 걸고 초대권 공연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번 공연은 춤꾼을 위해서 표를 사서 성의를 보이는 관객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1990년과 1991년 소설가인 전 남편 황석영(67)씨와 함께 세 차례 북한을 방문한 사실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돼 지난 20년간 독일과 미국을 떠돌아야만 했던 김명수씨가 모처럼 고국 무대에 선다. 오는 1~2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아리랑: 코리안 리추얼 솔로스(한국 굿춤 독무)’이다.
지난 2005년 7월 미국 뉴욕 댄스시어터 워크숍극장에서 첫선을 보여 현지 언론의 호평을 받은 데 이어 2006년 6월에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맨해튼 42번가 듀크극장에서 5일간 공연된 작품이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무용평론가 클라우디아 라 로코는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악령을 몰아낸 요정’이라는 기사에서 “그는 정교한 손놀림을 통해 신에게 바쳐지는 몸부림치는 요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김명수가 직접 애처로운 아리랑을 부를 때였다”고 리뷰를 썼다. 이 작품은 한 여인이 저녁 예불을 드리러 절에 갔다가 새벽예불까지 드리고 내려오는 줄거리로 짜였다. 삶의 고단함과 영혼, 죽음과 관련한 주제를 아리랑 열두 고개로 나눠 보여주는 극적인 무용 공연이다. 공연은 그가 객석으로부터 걸어 들어와서 무대 위에 올라 준비된 방에서 의상을 갈아입고 안채, 바깥채를 오가는 독창적인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100분간 혼자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고 나비춤, 부정놀이, 도살풀이, 검무,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을 춘다. 특히 공연의 첫머리에 8m 높이의 부석사 괘불탱화 아래에서 추는 나비춤은 2005년 8월 작고한 친정아버지인 조각가 고 김영중에게 바치는 춤이다. 공연에는 1823년 명당경아리랑부터 1991년 상주아리랑까지 ‘아리랑’ 노래가 작품 사이에 들려지며 대흥사의 찻물 따르는 소리, 개심사의 가랑비 소리, 무위사의 바람소리 등 사찰의 소리가 음향효과로 사용된다. 안무는 물론 무대, 소품, 의상 모두 그가 직접 디자인했다. 그는 “그간 유배자 생활을 하다시피 하면서 혼자 꼼지락 꼼지락 움직여서 준비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1984년 11월에 서울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고 1990년 한국을 떠났으니 26년 만에 고국 무대에 서는 셈이다. “저의 춤은 누가 추라고 해서 추는 것도 아니고 지원금을 받아 실적을 내기 위해 추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출 수밖에 없는 춤입니다. 살기 위해 부를 수밖에 없는 노래 ‘아리랑’인 만큼 저의 춤을 보러 오시는 관객 역시 김명수의 춤을 보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티켓을 사서 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무대와 객석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듯 혼연일체가 될 수 있어요.” 그는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라는 전설이 있다”며 “단테의 <신곡>에서도 열두 천국과 열두 지옥이 있고, 굿에서도 열두 거리를 하듯이 12라는 숫자는 힘들더라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의미를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은 “춤은 내게 축복이면서 저주였다”는 그가 20여년을 떠돌다 고국에서 다시 춤꾼으로 태어나는 뜻깊은 무대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편하게 춤을 추었는데 이번에는 1980년 데뷔할 때처럼 떨리고 긴장된다”고 털어놓았다. 아리랑이 300여 년 이상 우리 민족이 불러 온 애환의 노래이듯이 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그가 열두 아리랑 고개를 희망으로 오르는 무대가 기대된다. 그는 1967년 발레로 무용에 입문해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한 뒤 전통 춤으로 눈을 돌려 중요무형문화재 이동안(1906~1995), 김숙자(1927~1991), 이매방(83)에게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 1980년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사랑에서 청바지 바람에 춤을 추는 파격적인 시도로 ‘김명수 현대무용’ 데뷔 공연을 갖고 김명수댄스아트를 만들었다. 1986년 소설가 황석영(67)씨와 결혼한 뒤 1990~1991년 남편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뒤로 독일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2004~2006년에 걸쳐 황석영씨와 이혼소송을 겪기도 했다. 북한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한국 춤을 가르쳤으며 미국 영주권을 얻은 뒤로 1994년 ‘굿춤’, 1997년 ‘망명자의 폐허 그리고 재생’ 등을 공연하며 특히 북한에서 최승희(1911~1967)의 애제자인 김해춘과 공동 안무를 하기도 했다. (02)588-7520. 글 정상영 기자,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 2005년 7월 미국 뉴욕 댄스시어터 워크숍극장에서 첫선을 보여 현지 언론의 호평을 받은 데 이어 2006년 6월에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맨해튼 42번가 듀크극장에서 5일간 공연된 작품이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무용평론가 클라우디아 라 로코는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악령을 몰아낸 요정’이라는 기사에서 “그는 정교한 손놀림을 통해 신에게 바쳐지는 몸부림치는 요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김명수가 직접 애처로운 아리랑을 부를 때였다”고 리뷰를 썼다. 이 작품은 한 여인이 저녁 예불을 드리러 절에 갔다가 새벽예불까지 드리고 내려오는 줄거리로 짜였다. 삶의 고단함과 영혼, 죽음과 관련한 주제를 아리랑 열두 고개로 나눠 보여주는 극적인 무용 공연이다. 공연은 그가 객석으로부터 걸어 들어와서 무대 위에 올라 준비된 방에서 의상을 갈아입고 안채, 바깥채를 오가는 독창적인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100분간 혼자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고 나비춤, 부정놀이, 도살풀이, 검무,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을 춘다. 특히 공연의 첫머리에 8m 높이의 부석사 괘불탱화 아래에서 추는 나비춤은 2005년 8월 작고한 친정아버지인 조각가 고 김영중에게 바치는 춤이다. 공연에는 1823년 명당경아리랑부터 1991년 상주아리랑까지 ‘아리랑’ 노래가 작품 사이에 들려지며 대흥사의 찻물 따르는 소리, 개심사의 가랑비 소리, 무위사의 바람소리 등 사찰의 소리가 음향효과로 사용된다. 안무는 물론 무대, 소품, 의상 모두 그가 직접 디자인했다. 그는 “그간 유배자 생활을 하다시피 하면서 혼자 꼼지락 꼼지락 움직여서 준비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1984년 11월에 서울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고 1990년 한국을 떠났으니 26년 만에 고국 무대에 서는 셈이다. “저의 춤은 누가 추라고 해서 추는 것도 아니고 지원금을 받아 실적을 내기 위해 추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출 수밖에 없는 춤입니다. 살기 위해 부를 수밖에 없는 노래 ‘아리랑’인 만큼 저의 춤을 보러 오시는 관객 역시 김명수의 춤을 보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티켓을 사서 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무대와 객석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듯 혼연일체가 될 수 있어요.” 그는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라는 전설이 있다”며 “단테의 <신곡>에서도 열두 천국과 열두 지옥이 있고, 굿에서도 열두 거리를 하듯이 12라는 숫자는 힘들더라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의미를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은 “춤은 내게 축복이면서 저주였다”는 그가 20여년을 떠돌다 고국에서 다시 춤꾼으로 태어나는 뜻깊은 무대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편하게 춤을 추었는데 이번에는 1980년 데뷔할 때처럼 떨리고 긴장된다”고 털어놓았다. 아리랑이 300여 년 이상 우리 민족이 불러 온 애환의 노래이듯이 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그가 열두 아리랑 고개를 희망으로 오르는 무대가 기대된다. 그는 1967년 발레로 무용에 입문해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한 뒤 전통 춤으로 눈을 돌려 중요무형문화재 이동안(1906~1995), 김숙자(1927~1991), 이매방(83)에게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 1980년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사랑에서 청바지 바람에 춤을 추는 파격적인 시도로 ‘김명수 현대무용’ 데뷔 공연을 갖고 김명수댄스아트를 만들었다. 1986년 소설가 황석영(67)씨와 결혼한 뒤 1990~1991년 남편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뒤로 독일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2004~2006년에 걸쳐 황석영씨와 이혼소송을 겪기도 했다. 북한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한국 춤을 가르쳤으며 미국 영주권을 얻은 뒤로 1994년 ‘굿춤’, 1997년 ‘망명자의 폐허 그리고 재생’ 등을 공연하며 특히 북한에서 최승희(1911~1967)의 애제자인 김해춘과 공동 안무를 하기도 했다. (02)588-7520. 글 정상영 기자,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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