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전설 ‘가리온’
6년만에 2집 낸 힙합 전설 ‘가리온’
“가리온이 이 상을 받을 때까지 열심히 힙합 하겠습니다.”
2005년 골든디스크 상을 받은 드렁큰타이거의 타이거제이케이(JK)가 남긴 수상 소감이다. 대체 가리온이 누구이기에 한국 힙합을 대표하는 그가 이런 말을 한 걸까?
1997년 피시통신 하이텔에 흑인음악 동호회가 생겼다. 이름하여 ‘블렉스’. 힙합을 좋아하던 26살 청년 이재현은 서태지와 듀스를 보며 ‘나도 저 정도는 랩을 할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했다. 내친김에 몇몇 회원들과 엠피(mp)3 파일로 블렉스 1집을 만들어 온라인에 올렸다. 앨범에서 이재현은 엠시(MC·래퍼) 메타(오른쪽)가 됐다.
S1 등 정상급 프로듀서 동참
17곡에 ‘눈물과 고민’ 읊조려
공백기간 쌓은 내공 묻어나 서울 홍대 앞 클럽에서 블렉스 공연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객석에 있던 스무살 청년 정현일이 갑자기 무대에 올라 프리스타일 랩을 쏟아냈다. 메타는 ‘뭔가 불타오르는 게 있는 놈이군’ 하고 생각했다. 메타는 나중에 그를 찾아가 같이 활동하자고 제안했다. 정현일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엠시 나찰(왼쪽)이 됐다. 메타와 나찰로 이뤄진 힙합 그룹 가리온은 그렇게 태어났다. 대다수가 힙합은 외국 음악밖에 없는 줄 알았던 1998년이었다. 가리온은 클럽을 다니며 공연을 하고 또 했다. 새로운 곡들이 계속 완성됐고, 공연을 거치며 매끈하게 다듬어졌다. 2004년 그동안 갈고닦은 곡들을 모아 1집 <가리온>을 발표했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제이유(최재유)의 탁월한 감각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모든 가사는 100% 우리말로 썼다. 우리말로 라임(각운)을 만들고, 우리말로 그루브(흥)와 플로(흐름)를 탔다. 이 앨범은 ‘한국 힙합의 이정표’라는 평가를 받으며 힙합 마니아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우리말 랩을 고집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걸 내켜하지 않아요.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랩을 하는데 한국말로 하는 게 특이하게 보이는 게 이상한 거죠. 우리말로 랩을 하는 게 당연시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메타) 뛰어난 앨범임에도 언더그라운드라는 한계 탓인지 대중적으로 성공하진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메타는 힙합신을 떠나 신촌 세브란스병원 주차관리 요원으로 일했다. 일 잘한다고 주임으로 승진도 시켜줬다. 나찰은 대학에 복학해서 체육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 1년 6개월이 흘렀다. 메타 머릿속에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그 길로 일을 그만두고 나찰과 만났다. “우리 다시 해보자.”
2005년 말 디지털 싱글 ‘무투’와 ‘그날 이후’를 잇따라 발표하며 재시동을 걸었다. ‘무투’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힙합 싱글로 선정됐다. 곧바로 2집 준비에 들어갔다. 이듬해까지 80% 이상을 만들었지만, 이후 여러 변수를 맞닥뜨려야 했다. 음악 활동에 도움이 될까 발을 들인 뮤지컬 <래퍼스 파라다이스>는 시간만 잡아먹었고, 나찰은 허리 디스크에 걸렸다. 메타는 피치 못할 개인사정으로 고향 대구로 내려갔다. 그래도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건 음악밖에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메타는 나찰과 2집 작업에 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지난달 말 <가리온 2>가 1집 이후 6년 만에 발매된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내공, 눈물과 고민을 17곡에 꽉꽉 눌러담았다. 많은 실력파 프로듀서와 래퍼들이 객원으로 참여해 힘을 실어줬다. 카니예 웨스트 곡을 프로듀싱한 에스원(S1) 등 정상급 외국인 프로듀서도 4명이나 참여했다. 실력만 보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한국 힙합의 최전선’을 그들도 인정한 것이다. “내 꿈은 등에 달라붙은/ 현실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뿐/ 가쁜 숨을 내뿜는 부분/ 내 가슴속에서 널 털면 그뿐/ 아픈 마음은 날 구원 못해도/ 난 뻔뻔하게 날 속일 수 있어/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 난 무엇이 되길 원했던 걸까?/ 너무 늦은 것 같은 기분/ 자꾸 계속해 조여드는 슬픔/ 조금 특별하고픈 것뿐/ 오늘 다시 기억난 내 꿈”(‘산다는 게’ 중에서) ‘거리의 시인’ 가리온은 오늘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줄타기 하며 삶을, 세상을 읊조린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타일뮤직 제공
17곡에 ‘눈물과 고민’ 읊조려
공백기간 쌓은 내공 묻어나 서울 홍대 앞 클럽에서 블렉스 공연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객석에 있던 스무살 청년 정현일이 갑자기 무대에 올라 프리스타일 랩을 쏟아냈다. 메타는 ‘뭔가 불타오르는 게 있는 놈이군’ 하고 생각했다. 메타는 나중에 그를 찾아가 같이 활동하자고 제안했다. 정현일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엠시 나찰(왼쪽)이 됐다. 메타와 나찰로 이뤄진 힙합 그룹 가리온은 그렇게 태어났다. 대다수가 힙합은 외국 음악밖에 없는 줄 알았던 1998년이었다. 가리온은 클럽을 다니며 공연을 하고 또 했다. 새로운 곡들이 계속 완성됐고, 공연을 거치며 매끈하게 다듬어졌다. 2004년 그동안 갈고닦은 곡들을 모아 1집 <가리온>을 발표했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제이유(최재유)의 탁월한 감각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모든 가사는 100% 우리말로 썼다. 우리말로 라임(각운)을 만들고, 우리말로 그루브(흥)와 플로(흐름)를 탔다. 이 앨범은 ‘한국 힙합의 이정표’라는 평가를 받으며 힙합 마니아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우리말 랩을 고집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걸 내켜하지 않아요.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랩을 하는데 한국말로 하는 게 특이하게 보이는 게 이상한 거죠. 우리말로 랩을 하는 게 당연시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메타) 뛰어난 앨범임에도 언더그라운드라는 한계 탓인지 대중적으로 성공하진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메타는 힙합신을 떠나 신촌 세브란스병원 주차관리 요원으로 일했다. 일 잘한다고 주임으로 승진도 시켜줬다. 나찰은 대학에 복학해서 체육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 1년 6개월이 흘렀다. 메타 머릿속에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그 길로 일을 그만두고 나찰과 만났다. “우리 다시 해보자.”
2005년 말 디지털 싱글 ‘무투’와 ‘그날 이후’를 잇따라 발표하며 재시동을 걸었다. ‘무투’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힙합 싱글로 선정됐다. 곧바로 2집 준비에 들어갔다. 이듬해까지 80% 이상을 만들었지만, 이후 여러 변수를 맞닥뜨려야 했다. 음악 활동에 도움이 될까 발을 들인 뮤지컬 <래퍼스 파라다이스>는 시간만 잡아먹었고, 나찰은 허리 디스크에 걸렸다. 메타는 피치 못할 개인사정으로 고향 대구로 내려갔다. 그래도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건 음악밖에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메타는 나찰과 2집 작업에 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지난달 말 <가리온 2>가 1집 이후 6년 만에 발매된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내공, 눈물과 고민을 17곡에 꽉꽉 눌러담았다. 많은 실력파 프로듀서와 래퍼들이 객원으로 참여해 힘을 실어줬다. 카니예 웨스트 곡을 프로듀싱한 에스원(S1) 등 정상급 외국인 프로듀서도 4명이나 참여했다. 실력만 보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한국 힙합의 최전선’을 그들도 인정한 것이다. “내 꿈은 등에 달라붙은/ 현실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뿐/ 가쁜 숨을 내뿜는 부분/ 내 가슴속에서 널 털면 그뿐/ 아픈 마음은 날 구원 못해도/ 난 뻔뻔하게 날 속일 수 있어/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 난 무엇이 되길 원했던 걸까?/ 너무 늦은 것 같은 기분/ 자꾸 계속해 조여드는 슬픔/ 조금 특별하고픈 것뿐/ 오늘 다시 기억난 내 꿈”(‘산다는 게’ 중에서) ‘거리의 시인’ 가리온은 오늘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줄타기 하며 삶을, 세상을 읊조린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타일뮤직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