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비트]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사망 기사가 어제 한겨레에 실렸다.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그는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라는 쪽지를 옆 집 문에 붙여놓고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영화계의 잔혹한 현실을 성토했고, 어떤 이들은 사회적 타살과 자살 사이에서 논쟁을 벌였으며, 다른 이는 ‘개인’과 ‘시스템’을 입에 올리며 언성을 높였다. 그를 죽게 한 공범으로서 깊은 애도를 표하며 명복을 빈다.
그런데 최고은 씨의 죽음을 접하며 이상하게도 내 머리 속에는 콰이엇(The Quiett)과 도끼(Dok2)가 떠올랐다. 떠올리고 싶어 떠올린 게 아니라 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최고은 씨의 죽음과 그들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 콰이엇과 도끼에게서 인상적으로 느꼈던 어떤 부분이 이번 사건을 통해 더욱 도드라지게 다가왔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느슨하다면 매우 느슨한 연결고리다.
힙합 뮤지션인 콰이엇과 도끼는 최근 함께 일리네어 레코드(Illionaire Records)를 설립했다. 자신들만의 레이블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힙합’을 ‘전업’으로 하면서 구색을 갖춘 자신들의 회사를 차릴 만큼 경제적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세세하게는 잘 모른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넘겨짚기도 아닐 것이다. 그들 스스로 음악을 통해 그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출신은 옥상 컨테이너 박스/ 오백원 짜리 하나 없는 곳에서 밥/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지를 못하고 살던 내가/ 이제는 부페 아님 뭐? outback steak house/ yeah i ain’t fallin’ i’m ballin’/ 통장엔 많은 공이 굴러다니지 볼링…/ 택시는커녕 없었지 버스비도/ 이젠 일등석은 아니지만 하와이로…”
“가난은 날 죽이지 못해 날 두 배로 불릴 뿐/ 불과 몇 달 전 몇 백이 이제는 억이 되어 다시 쏟아 부었지…“
“…난 내 인생을 바꿨어 가요 Track 하나 없이도/ 모두가 날 알어 가요 Rap 하나 없이도/ I got my money flow Yeah I’m livin’ better now/ 돈 벌려면 가요 하란 놈들 다 데려와”
그들의 최근 가사다. 물론 당연히 이 가사들은 힙합 특유의 스웨거(swagger)라는 개념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자기표현, 혹은 자기 홍보, 뽐내기, 으스댐 같은 단어로 대체 가능한 이 개념은 힙합 문화를 설명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될 요소다. 대체로 흑인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구를 하거나 랩을 하고 있고, 랩 스타로서의 성공은 곧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했음을 의미한다. 가장 유명한 래퍼의 예를 살펴보자. 50센트(50Cent)의 데뷔 앨범명은 [Get Rich or Die Tryin']이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그의 히트 싱글 중 하나의 제목은 ‘I Get Money’다. 역시 너무나 쉬운 영어다. 만약 힙합 문외한 혜민이가 본다면 이 앨범명과 곡명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갈 곳이 없는 절박함, 그리고 부의 과시 뒤에 숨겨진 ‘자수성가 신화의 증명’이라는 행간을 읽어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어낸 것을 정당(?)하게 과시하는 것. 스웨거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콰이엇과 도끼는 다른 한국힙합 뮤지션과 일정하게 차별화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콰이엇과 도끼는 실제 삶과 스웨거가 일치하는 최초의 한국힙합 뮤지션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대부분의 한국힙합 뮤지션이 미국힙합의 스웨거 개념을 ‘다른 음악장르와 구별되는 힙합 특유의 정서와 표현이 주는 묘미와 카타르시스’로밖에 차용할 수 없는 반면, 콰이엇과 도끼는 자신들의 삶을 옮겨 적은 가사가 그대로 스웨거로 완성된다. 비록 그들이 백만장자는 아니지만, 마치 50센트처럼 말이다.
이렇듯 스웨거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들의 행태가 나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나 역시 한 명의 힙합인으로서 발라드에 투항하지 않고 힙합으로 이만큼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 것 같아 흐뭇하고, 그들 자신에게도 뿌듯한 역사일 것이며, 힙합 뮤지션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분명 좋은 롤모델이 될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불편한 지점 역시 존재한다. 멋지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이유. 음악적 이유라기보다는 사회적 이유. 또 다른 그들의 가사를 옮겨본다.
“여기는 안 돼 현실을 탓해 머리를 맞대 고민해 봤자 니들이 하는 소리는 같애/ Stop Bitchin’ Hip-Hop 그런 거 벌이는 안 된다고 말하는 너만 안 될 뿐…”
“우리 엄마는 말해 힘들 때를 잊지 말라고/ 어떻게 잊겠어 아무리 시간이 빨라도/ hey kids 이거 하나만은 알아둬/ 누구나 해낼 수 있지 방식은 달라도…”
노력도 않고 이루어놓은 것도 없으면서 볼멘소리만 늘어놓는 이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후배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예쁜(?) 마음을 꼬아볼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의문이다. 힙합이 벌이가 된다고 굳게 믿으며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이들처럼 될 수 있을까? 재능만 있다면, 콰이엇과 도끼가 그랬듯 꾸준히 한 우물을 파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을까?
최고은 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안타깝게도 최고은 씨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설령 전도유망했던 그녀의 비극적 죽음을 극단적인 예외 사례로 본다고 해도, 재능이 뛰어나고 열정이 넘쳤던 그녀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개인이 부당한 구조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알몸처럼 드러낸다. 그리고 그 ‘부당한 구조’는 영화판 뿐 아니라 ‘음악판’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그 하부의 ‘힙합판’에도 도사리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부당한 구조의 ‘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것이 음악적이든 경제적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콰이엇과 도끼가 ‘힙합’을 하면서 쌓아올린 성과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스스로 이루어낸 것을 가사를 통해 드러낸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개인의 재능, 여러 상황과 조건, 운 등이 맞아떨어져 발생한, 말하자면 특수한 집합체다. 다른 누군가가 그들처럼 될 수도 있지만 훨씬 더 많은 힙합 씬의 누군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처럼 될 수 없을 것이다. 못나서가 아니다. 개인의 재능과 노력을 가뿐히 초월하는 부당한 구조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역시 나는 노파심의 신답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다니. fuck 노파심. 그러나 돌다리 두들겨 잃을 것은 없다. 부디 콰이엇과 도끼, 이 두 랩 스타의 현재가 재능이나 노력 같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힙합 씬의 구조와 시스템을 되돌아보는 성찰적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힙합인의 한 명으로서 가져본다.
김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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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최근 가사다. 물론 당연히 이 가사들은 힙합 특유의 스웨거(swagger)라는 개념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자기표현, 혹은 자기 홍보, 뽐내기, 으스댐 같은 단어로 대체 가능한 이 개념은 힙합 문화를 설명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될 요소다. 대체로 흑인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구를 하거나 랩을 하고 있고, 랩 스타로서의 성공은 곧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했음을 의미한다. 가장 유명한 래퍼의 예를 살펴보자. 50센트(50Cent)의 데뷔 앨범명은 [Get Rich or Die Tryin']이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그의 히트 싱글 중 하나의 제목은 ‘I Get Money’다. 역시 너무나 쉬운 영어다. 만약 힙합 문외한 혜민이가 본다면 이 앨범명과 곡명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갈 곳이 없는 절박함, 그리고 부의 과시 뒤에 숨겨진 ‘자수성가 신화의 증명’이라는 행간을 읽어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어낸 것을 정당(?)하게 과시하는 것. 스웨거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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