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사토루 ‘흙-물-불 지구-구름-바람’
호시노 사토루 등 15명 작품 선봬
별처럼 뿌리고 종이처럼 접어
흙의 생명력 탐구·상상력 변주
별처럼 뿌리고 종이처럼 접어
흙의 생명력 탐구·상상력 변주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테라코타전’
“거대한 흙더미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지요.”
일본 중견 도예가 호시노 사토루(66)는 1986년 애지중지하던 작업실이 뜻밖의 산사태에 휩쓸려버리는 참화를 겪은 뒤 새로운 작가 인생을 내딛게 된다. 난장판이 된 작업실 잔해를 망연자실 지켜본 것도 잠시. 쓰나미처럼 밀려온 흙무더기 속에서 “흙의 물성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된 것이다. 그 뒤 그때까지 애써왔던 작업 방식과 태도를 작가는 모두 버렸다. 특정한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재료로서만 흙을 바라보았던 시각을 훌훌 벗어던졌다. 재발견한 흙은 강렬한 힘과 에너지가 넘실거리는 대자연의 실체였다. 오직 흙 자체에 몰두하는 고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 고행의 결실은 바닥과 벽면에 별처럼 흩뿌린 듯한 흙덩이들의 춤이었다.
경남 김해시 진례면에 있는 국내 유일의 건축도자전문미술관인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 가면, 초벌구이한 흙덩이를 한땀 한땀 벽면에 내건 소우주 같은 사토루의 작업들을 볼 수 있다. 손가락으로 흙을 떼어내고 직접 주무르고 늘이면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흙덩이를 빚고 거멓게 구워 벽면에 발라내는 설치적 작업들은 작가가 느꼈음직한 자유로운 해방감을 발산한다.
그가 출품한 작품 마당은 ‘테라코타, 원시적 미래’란 이름으로 8월28일까지 열리는 이 미술관의 개관 5주년전이다.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현대 도예가 15명의 테라코타(진흙으로 빚어 초벌구이한 조형물) 작품들을 추려 선보인 이 전시는 ‘신비의 정원’, ‘진화’, ‘타자들’, ‘원시적 미래’의 4부로 나뉘었지만, 이런 섹션들이 감상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그릇 혹은 건축재 정도로 막연히 도예를 생각해왔던 세간의 통념을 깨뜨리는 물, 불, 흙의 장엄한 자연적 상상력을 느낄 수만 있다면 전시 감상의 태반 이상은 이룬 것이라고 봐도 좋다. 그만큼 현대 도예계의 최전선에서 활동중인 서구, 한국, 일본 테라코타 작가들의 자유로운 조형 의식들을 한눈에 즐길 수 있다는 게 이 전시만의 특장이다.
들머리 유리 돔 광장에서 조경 디자이너 전은정씨가 사진가 배병우씨의 소나무, 계곡 사진을 배경으로 심은 대나무 숲 ‘신비의 정원’을 지나면서 전시는 원형의 동선을 따라 풀려나온다. 2부 ‘진화’에서 사토루 작업과 아울러 눈을 잡아끄는 건 아프리카 개미집을 떠올리게 하는 영국 작가 로슨 오이칸의 2007년 작 ‘물리학 시리즈’다. 사람 키를 넘어 삐쭉 솟은 흙탑 곳곳에 곰보처럼 뚫린 구멍, 표면과 구멍 위를 미세하게 뒤덮은 거미줄 이미지들이 탑이 들숨과 날숨을 쉬는 듯한 환영을 일으킨다. 흙의 유기체적 성질에 대한 면밀한 탐구와 인류의 본향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작가의 존경심이 배어 있는 역작이다.
3부 ‘타자들’은 테라코타로 만든 친근한 인물 소조상들의 잔치다. 무엇보다 우리 전통 마애불 보살입상 같기도, 중세 유럽의 성자상 같기도 한 여인상 열주들이 시선을 빼앗는다. 국내 중견 도예가 한애규씨의 근작 ‘기둥’이다. 중세 유럽 고딕식 성당의 장식상 모티프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기둥’은 시대를 초월한 여성적 모성애를 인류애로 승화시키려는 작가적 의지가 깃들어 있다. 풍만하고 수더분한 여인상 연작에 주력해오던 작가의 작업 이력에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의 병사 이미지에 소녀, 아이들의 얼굴을 덧입힌 노르웨이 작가 마리안 헤이어달은 전쟁의 비인간성, 지독한 생존 경쟁 앞에 놓인 현대 청소년들의 불안감까지 함께 떠올리게 하는 예지력을 드러낸다. 일본 작가 아키오 다카모리의 우울한 소년, 생활인 군상들 또한 헤이어달처럼 중국 고대 한나라 인물 도용에서 상상력을 길어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테라코타 특유의 질감이 뿜는 상상력은 4부 ‘원시적 미래’에서 더욱 파천황적인 이미지로 변주된다. 테라코타에 색색의 스펀지를 덧대고 씨를 뿌려 식물을 키우는 미국 작가 제프 슈무키의 원예 설치 작품이나, 마치 종이접기나 골판지 종이 구조물을 조립한 듯한 이미지의 네덜란드 작가 야세르 발르만의 조형물 등이 눈맛을 더해준다. 이탈리아 거장 키리코의 회화적 배경 같은 육중하고 구축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독일 작가 만프레트 에메네거-칸츨러의 모던한 구조물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전시는 양면성이 두드러진다. 서구 문제적 작가들의 도발적이거나 친생태적인 테라코타 근작들의 실험 정신에 견주어, 국내 도예 작가들의 작업은 상상력이나 조형의식 면에서 확연히 동떨어져 있다는 착잡함 또한 일어난다. 원 같은 기하학적 이미지나 애니메이션을 부풀려 재현한 듯한 정형화된 이미지 코드에 머물러 있는 국내 도예 작업의 현주소가 건축, 가구, 추상 회화의 경지까지 이른 외국 작가들의 분방한 상상력 앞에서 그만큼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www.clayarch.org, (055)340-7000. 김해/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제공
‘테라코타 원시적 미래’ 2부 ‘진화’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전경
아키오 다카모리 ‘남자아이’
이번 전시는 양면성이 두드러진다. 서구 문제적 작가들의 도발적이거나 친생태적인 테라코타 근작들의 실험 정신에 견주어, 국내 도예 작가들의 작업은 상상력이나 조형의식 면에서 확연히 동떨어져 있다는 착잡함 또한 일어난다. 원 같은 기하학적 이미지나 애니메이션을 부풀려 재현한 듯한 정형화된 이미지 코드에 머물러 있는 국내 도예 작업의 현주소가 건축, 가구, 추상 회화의 경지까지 이른 외국 작가들의 분방한 상상력 앞에서 그만큼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www.clayarch.org, (055)340-7000. 김해/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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