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Hamlet’
박근형표 연극 ‘햄릿, Hamlet’
‘지금 여기의’ 세트·의상 선봬
원작과 다르게 악은 살아남아
‘지금 여기의’ 세트·의상 선봬
원작과 다르게 악은 살아남아
무대의 배경은 ‘코션(CAUTION: 경고)’이라고 쓰인 2층짜리 컨테이너. 시종 비통한 표정의 햄릿은 몸에 딱 떨어지는 검은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회색 정장에 자줏빛 베스트를 입고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그의 삼촌 클로어디스는 패션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다. 햄릿의 모친 거투르드는 ‘에이(A)라인’ 치마를, 연인 오필리어는 검은 원피스에 빨간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극은 ‘21세기 햄릿’이다. “덴마크 왕이 죽었다”로 시작하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기본 설정을 따르지만, 2011년 ‘지금, 여기’의 이야기임을 세트와 의상은 분명히 보여준다.
지난 8일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엠씨어터에서 공연중인 <햄릿, Hamlet>은 국내 대표적인 흥행 연출가 박근형(48·사진)씨가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의 번역본을 토대로 각색했다. 서울시극단이 창립 15돌을 맞아 함께 준비했다. 극단과 박씨의 만남은 2009년 <마라, 사드>에 이어 두번째다. 박씨는 “고전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고민을 담고 싶었다”고 ‘박근형표 햄릿’을 이야기했다. “세상 살기가 녹록지 않잖아요.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망설이고 쭈뼛댈 수밖에 없고, 그러다 실행에 옮겨도 실패하곤 합니다. 그런 도시인의 모습이 바로 햄릿과 닮아 있죠.”
현대적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박씨가 새로 넣었다는 대사는 관객에게 은근한 쾌감을 준다. ‘조간신문도 짜증나’, ‘21세기에 이런 썩은 곳’, ‘너희들의 엿같은 하느님’, ‘방사능 낙진’ 등등의 표현들이 자연스레 등장한다. 물론 소품들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비극의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햄릿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읊고, 야구공을 갖고 놀며 미친 척한다. 수다스런 간신 폴로니우스가 등장할 때나 남녀의 성별을 뒤바꾼 극중극 장면은 관객이 햄릿을 재밌게 즐길 수 있게 하는 양념 구실을 한다. 다만 코믹한 장면과 진지한 장면이 붙어 있어서 극의 분위기가 전환될 때 집중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연출가 의도대로 <햄릿…>의 가장 큰 매력은 ‘누구나 알지만 또 모두가 어려워하는’ 고전을 다가가기 쉽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딱딱하고 어려울 것이란 편견으로 고전 연극을 꺼리는 관객이라도 재밌게 볼 수 있다. 드라마 <연개소문>을 작업한 이충한 음악감독의 음악도 한몫한다. 암전 때마다 나오는 웅장한 사극풍 음악과 ‘오필리어의 테마’로 쓰이는 애잔한 발라드, 희극 배우들이 따라 추는 왈츠는 연극 관람에서 듣는 재미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입에 착착 감기는 대사와 음악, ‘슈트 간지’ 햄릿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망설임과 행동 사이의 갈등’, ‘지금 여기의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물음에 맞닥뜨리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극의 끝부분에 있다. 박근형표 햄릿은 원작과 다른 결말을 택한다. 악은 살아남는다. 박씨는 “악이 사라지면 좋겠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악인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죽는 원작보다 더 비극이 된 걸까. 박씨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그 자신은 부조리를 없애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좀더 진보한 ‘새 햄릿’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이 달라진 비극의 희망적 역설일지 모른다. 박씨는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하지만 언제부턴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많아졌고 사람들은 숨죽이고 망설이는 것 같다. 이성과 뜨거운 심장으로 덴마크의 평화를 가져다줄 또다른 햄릿을 준비하는 일이 우리 세대의 몫”이라고 했다.
극중에서 햄릿은 ‘연극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고전의 무거움을 걷어낸 자리에 ‘지금’이 남았다.
서울시극단 소속으로 최근 끝난 드라마 <싸인>에서 강형사 역을 맡았던 배우 강신구씨가 햄릿을 맡았다. 배우 황성대씨는 클로어디스를 맡아 카리스마 있는 악역 연기를 보여준다. 이밖에 이창직, 서경화, 최나라, 김도균, 강지은씨 등이 출연한다. 24일까지. (02)399-1114~6.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박근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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