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철 ‘실크로드 프로젝트’
폐현수막이 인도 등서 커튼·모자로
“일상적인 일, 창조적인 일로 승화”
폐현수막이 인도 등서 커튼·모자로
“일상적인 일, 창조적인 일로 승화”
미술관이 아니라 동네 운동회에 온 듯하다.
전시장 천장에는 ‘재즈댄스’, ‘파산 청산’, ‘아파트 분양’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현수막이 마치 만국기처럼 매달려 있다. 벽에 길처럼 한 줄로 걸려 있는 세계 각국의 풍물사진들에도 ‘○○ 웨딩홀’, ‘XX나이트클럽’ 같은 한글글씨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011 오늘의 작가 정재철 실크로드 프로젝트’ 전시회 모습이다.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삶이 예술이고 여행이 미술이다’라는 생각을 실행한 결과물입니다. 교역과 전쟁, 화해와 평화의 길이자 문명의 이동로였던 실크로드의 동단에서 서쪽 끝에 이르는 구간을 관통하는 여행이 준 선물이죠. 동과 서, 중앙과 주변을 연결하고, 국경으로 단절된 경계를 해체하며, 다름과 차이가 공존하고 수용되고 변화하는 소통의 길로써 실크로드의 역사적 상징성을 현재의 삶 속에서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적 점이와 중첩, 그리고 혼성을 드러내려 했어요.”
정재철(52·사진) 작가는 “현재 우리의 과도한 소비문화와 문화적 과정의 단면을 잘 기록하고 있는 사물인 ‘폐현수막’이 각기 다른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사물로 만들어져서 사용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고 설명했다.
이 전시는 작가가 지난 7년간 서울에서 런던에 이르는 육로와 샛길을 잇는 실크로드를 톺아보는 고된 수행과 그 과정의 퇴적을 보여주는 ‘과정 미술’전, 또는 ‘개념 미술’전이다. 그는 2004년 3월 한국의 폐현수막 2천장을 들고 중국 시안에서 출발해 인도, 네팔을 거쳐 파키스탄 라호르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 사람들에게 현수막을 나눠주고 자유롭게 쓰게 한 뒤 6개월 후 다시 찾아 현수막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사진과 영상, 드로잉, 지도, 작업노트 등으로 기록했다. 한국에서 용도 폐기된 현수막은 그곳에서 사원이나 시장 좌판의 햇빛 가리개가 되었고, 커튼과 모자, 옷이 되었다.
“폐현수막들이 문화적 중첩이 이루어진 사물로 거듭나면서 재활용의 의미를 더욱 넓게 확장하여, 일상적 일들이 창조적 활동으로 승화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창작과 감상의 소통구조가 혼합이 일어나도록 의도하는 형식 실험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관객들에게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전 구간작업 기록물들을 보여줌으로써 일상적인 일들이 창조적인 일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고 싶다”고 말했다. 또 “관객들도 누구나 어디서나 쉽게 미술을 창작하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조소과 출신인 작가는 30대 초반부터 <사이>, <은둔의 숲>, <나무>와 같은 나무 본래의 자연성을 살린 추상조각으로 주목받았다. 1996년 이후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조각의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2000년대 초반부터 불교조각 전파 루트를 따라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실크로드의 역사성, 문화의 점이와 혼성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전시는 6월16일까지. (02)3217-6484.
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