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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지지고 볶다 마음 통한 ‘콩가루 가족’

등록 2011-07-05 20:43

연극 <아시안 스위트> 출연배우들. 왼쪽부터 시로 역의 김두봉, 미쓰코 역의 김순이, 지요코 역의 이항나, 아사다 역의 배성우.
연극 <아시안 스위트> 출연배우들. 왼쪽부터 시로 역의 김두봉, 미쓰코 역의 김순이, 지요코 역의 이항나, 아사다 역의 배성우.
전재산 사기 당한 남동생
누나에 얹혀사는 옛 애인…
상처 드러내며 한뼘 자라
재일동포 정의신씨 작품
연극 ‘아시안 스위트’

새해를 기다리는 12월31일 밤.

일본 어느 변두리 재개발 동네의 한 집안에서 가족들이 보글보글 끓는 전골냄비를 앞에 두고 빙 둘러앉았다. ‘새해를 함께 맞는 화목한 가족?’ 이렇게 부르기엔 조금 어색한 세명의 가족과 한명의 객식구. 한쪽 다리가 불편한 몸으로 아버지가 물려준 양장점을 하며 혼자 살아가는 누나 지요코와 영화 공부의 꿈을 안고 공장에서 일했지만 사기로 모은 돈을 날리고 귀향한 동생 시로, 두 남매가 어렸을 때 떠난 뒤 두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고 다시 ‘돌싱’이 된 엄마 미쓰코가 어렵게 모였다. 여기에 지요코의 옛 연인이자, 지금은 부인과 별거중인 채 그에게 얹혀사는 아사다가 끼어든다.

지난달 30일부터 공연중인 연극 <아시안 스위트>는 12월25일 크리스마스 밤부터 시작된 이 네 가족 이야기다. 그들은 실컷 싸우고, 화를 내고, 울고, 사과를 하고 나서야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재일동포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의신씨의 작품. 정 작가는 일본에서 활약하다 2004년 세상을 떠난 배우 김구미자의 생전에 그를 위해 이 작품을 썼고, 김구미자가 지요코 역으로 출연한 연극은 일본에서 인기리에 공연됐다. 사실적이고 섬세한 표현과 소소한 유머로 정평이 난 연출가의 특징이 <아시안 스위트>에도 잘 드러난다.

40대의 딸을 두고도 철들지 않은 모습의 엄마 미쓰코와 한번도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부르며 원망하는 시로의 갈등, 미쓰코와 그가 노골적으로 미워하는 객식구 아사다의 대립은 때로는 아프지만, 대체로 웃긴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좋다. 특히 아사다 역의 배우 배성우는 특별히 우스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등장하면서부터 객석에 웃음을 준다. 어벙한 표정과 진짜 말투인지 연기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약간 ‘모자란’ 듯한 말투며 걸음걸이까지 온몸으로 ‘전 여자친구에게 얹혀사는’ 못난 남자를 표현한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모비딕>에서 비중은 작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는 ‘뭘 해도 어설픈 루저’ 연기로 아사다 역에 기막히게 어울리는 전형을 만들어냈다.

<아시안 스위트> 지요코 역의 이항나(왼쪽)와 아사다 역의 배성우.
<아시안 스위트> 지요코 역의 이항나(왼쪽)와 아사다 역의 배성우.
<아시안 스위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 결핍돼 있다. 사랑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외로움에 허덕이며 친구를 찾다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자신의 실패와 결핍을 감추려고 이들은 위악을 떨거나 바락바락 악을 쓴다. ‘아이들을 버린’ 엄마 미쓰코는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당당하다. 누나에게는 다정한 시로도 자신의 실패가 드러나자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화를 낸다. 좀체 속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던 아사다와 가장 안정돼 보이던 지요코도 결국은 무대 위에서 ‘폭발’하고 만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 상처를 주고 힘들었던 시간이 들춰지고 난 뒤, 식탁을 둘러싼 공기는 평온해진다. 그게 원망이든 욕이든 모두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한번씩은 발작하듯 털어놓고 난 뒤 가족들 사이를 둘러싼 막은 조금씩 걷힌다. 작가의 전작들처럼, <아시안 스위트> 또한 보잘것없고 특별히 열심히 살지도 않는 삶에 대한 위로이자, 크게 아프고 지르고 난 뒤 한뼘 더 성장하는 관계에 대한 통찰이다.

연출가 정씨는 1960년대 곱창구이집으로 생계를 잇던 일본 간사이 재일동포들의 애환을 다룬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한 이 작품은 지난 3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전회 매진을 기록했고, 2008년 4월 일본 초연 때도 전회 표가 다 팔려 화제가 됐다. <아시안 스위트>는 14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3~31일 서울 혜화동 키작은소나무 극장에서 공연된다. (02)3668-0029.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사진 조은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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