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파도와 총석> 앞에 선 강요배 작가.
강요배 작가 개인전 ‘풍화’
대형 캔버스 24점 선봬
종이 접어 긁으니 새 느낌
한국사회 답답증 같은 것
그림으로 해방시키고파
대형 캔버스 24점 선봬
종이 접어 긁으니 새 느낌
한국사회 답답증 같은 것
그림으로 해방시키고파
제주의 화가 강요배(59) 작가가 대작들로 전시장을 한가득 채운 작품마당을 차렸다. 지난달 29일부터 제주돌문화공원 경내 오백장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풍화’는 작가 특유의 아릿한 제주 풍경을 거대한 화폭들로 엿볼 수 있는 자리다.
이번 전시는 2008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 지 3년 만이다. 마흔살에 고향 제주도에 내려가 10년간 방황하다가 한라산 자락인 한림읍 귀덕리에 화사(작업실)를 지어 정착한 지도 10년. 귀향 뒤 작업들을 결산하는 작품마당으로 꾸몄다. 화산섬의 바다, 돌, 바람, 별, 소리 등 작가의 눈과 마음속 제주 풍광을 80호부터 1000호에 이르는 근작 24점의 대형 캔버스에 담아냈다. 서울에서 작업하던 1979년부터 틈틈이 그려온 드로잉 50점도 추려서 함께 내놓았다.
“풍화라는 게 장구한 세월 같은 것을 머금은 자연 현상 아닐까요. 오랜 시간과, 나이 들어가는 나 자신의 일생에 대해서 되돌아보려 했어요. 시간이 흐르면 나도, 자연도 풍화되어가는 것이니까요. 다시 말해 자연을 보는 방법이 하나가 되고, 자기 내면 쪽으로 시선을 돌려 생각해보는 것이 다른 하나라고 볼 수 있고…”
지난 주말 전시장이 있는 돌문화공원과 귀덕리 화사를 오가는 길에서 만난 작가는 “제주의 풍경을 소재로 빌려서 나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려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제주의 자연과 역사에 자신의 존재를 비춰보려고 했다는 말이었다.
1000호 크기의 <물돌>, <용부리-백록담>, <개천> 등 전시장에 나온 대작들은 단순한 구성과 간결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제주 바다와 산야 곳곳을 담은 풍경화임에도 화려한 색채와 세세한 묘사 대신, 굵은 선과 짙은 색감, 거칠지만 견고한 조형미가 도드라진다. 그래서 힘이 있고 명쾌해 보인다.
강 작가는 “기억 속에 있는 것, 많이 보았던 것을 활용해서 작업하는데 구체적인 장소나 세부적인 형태는 큰 관심이 없다. 큰 느낌만 오면 나머지 형태는 대충 생략해버린다”고 했다. 그의 그림이 점차 선이나 색채가 단순화되고 추상적인 구도로 흘러가는 데 대한 설명으로도 들린다. “풍경이 너무 강조되면 자연히 대상이 그 풍경 중심으로 (변질)되어버리죠. 그렇기 때문에 중간 영역을 어떻게 하든 잡아내려고 했습니다.”
출품작들을 본 미술평론가 김영호씨는 “그의 작품들은 자연과 역사를 담아내는 그릇의 차원을 넘어 자연과 역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강요배의 근작들은 자연에 대한 우주적 영감을 표상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노력의 결실들”이라는 평이다.
최근 강요배 작가는 종이붓을 이용한 조형 기법의 실험에 빠져 있다고 했다. 접거나 구겨진 종이를 붓 삼아 물감을 올리고 치면서 거칠고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질감을 얻는 작업이다. 전시에 나온 <서북벽>과 <물과 불의 산>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현장에서 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입력된 이미지를 마음대로 부려가지고 작업을 해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종이붓을 사용하게 된 겁니다. 목필은 너무 얌전하고 뻔한 터치가 나오지만, 종이를 접어 긁으면 새로운 실감이나 터치가 나옵니다. 비로소 제가 생각하는 풍경을 그릴 수 있게 된 거죠.”
작가가 말한 것처럼, 그의 마음속에는 정말 풍화가 진행되고 있는 걸까. 그는 “내 마음에는 아직 울분, 답답증, 자유롭고 싶은 생각 등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 풍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서귀포 중문의 거대한 육각형 돌기둥 주상절리를 그린 대작 <파도와 총석>을 보면, 아직 풍화되지 않는 작가의 분노와 열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온화할 때도 있지만 좀더 격정적인 정서도 있고, 때론 통쾌한 것도 하고 싶거든요. 이런 정서들이 교차하면서 계속 작품을 하게 되지요. 추상적인 심정, 그런 상태를 계속 교차시키면 그림이 만들어지더라고.”
그렇다면, 작가가 앞으로 평생 그리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물음을 던지자 작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답답증 같은 것, 무언가 말할 수 없는 것을 해방시켜주는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초등학교 시절 모친이 ‘머리가 시원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요. 자유롭다는 게 그런 겁니다. 한국 사회에 살면서 머리가 답답해지지 않을 수 없어요. 지금은 화가로 그림에 매달리고 있지만, 결국 한 인간이 자기 삶을 진실되게 잘 마무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요.” 전시는 10월21일까지. (064)710-7487.
제주/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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