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초상화의 비밀’ 특별전
영조 시절부터 근대까지
200점 모아 변천사 집약
루벤스 등 작품도 전시
성리학 ‘인문정신’ 생생
영조 시절부터 근대까지
200점 모아 변천사 집약
루벤스 등 작품도 전시
성리학 ‘인문정신’ 생생
서늘하다. 서릿발처럼 내뿜는 그림 속 선비들과 제왕들의 형형한 눈빛과 기품에 주눅 든 이들도 있을 터다. 지난 27일부터 시작한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초상화의 비밀’ 전시실에는 조선시대를 움직인 숱한 위인들 초상이 도열해 있다. 조선시대 성행한 옛 초상화들의 변천사를 한자리에서 보여주려고 기획한 이번 전시는 작품 양만 200점이 넘는 역대 최대 규모다. 윤두서, 이명기, 김홍도, 강세황, 이인상, 채용신 등 이름난 옛 대가들이 그린 걸작을 비롯해 중국, 일본, 유럽의 옛 초상화까지 두루 내걸려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정신 내면까지 발라내는 핍진한 사실적 묘사로 이름높다. 하지만 티치아노,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의 초상화처럼 서양에도 심리적 통찰이 돋보이는 초상화 걸작들은 널려 있다. 전시의 고갱이는 사실 이런 묘사의 특질보다 초상 내면에 서린 조선 특유의 정신세계를 탐험한다는 데 있다.
들머리 젊은 시절 영조(연잉군)의 불탄 초상으로 시작해 20세기 초 근대 화가 6명이 술판에서 그린 캐리커처식 초상으로 끝나는 이 전시는 한마디로 예법과 자기 수양에 철저했던 조선 특유의 유교 정신 문화가 점차 스러져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와 영조, 철종 등의 임금 초상(어진)과 채제공, 이창운, 이원익 등의 공신, 중신들을 의자에 앉은 꼿꼿한 구도로 그린 조선 중후기 초상화들은 감상이 아닌 제례용으로 그려졌다. 엄격한 법식과 터럭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꼼꼼한 사실적 묘사는 정신적인 수양과 실천으로 받아들여졌다. 정면 왼쪽을 향해 앉은 자세, 손을 감춘 포즈, 정연한 구성의 돗자리, 얽은 얼굴 곰보자국까지 그린 생생한 묘사 등이 그런 산물들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념사진을 중시하듯 당시 선조들에게도 이미지를 간직하려는 욕망은 절실했으니, 정조가 아끼던 채제공, 이재협 같은 신하들 초상을 그리게 하고 평을 한 어제첩(일본 덴리대 도서관 소장)이나 1774년 무과시험 합격자 18명의 초상화첩이 이를 드러내준다.
지금 그림에는 사라진 성리학적 인문정신을 대변하는 걸작은 18세기 최고 화원 이명기, 김홍도가 합작한 <서직수 초상>(오른쪽 그림)과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왼쪽 위)을 꼽을 수 있다. 돗자리에 흰 버선발, 백색 도포를 입고 치켜 올라간 눈꼬리로 눈빛을 내쏘는 서직수의 단단한 몸 매무새와 하늘거리는 수염이 덮인 공재의 얼굴상이 육박해온다. 62살 서직수의 자태는 궁중화원 이명기가 얼굴을, 김홍도가 몸을 그렸다. 부드러우면서도 옹골찬 외유내강의 자태에 ‘내 한평생 속되지 않았다’는 서직수의 자평 글씨가 어우러져 선비 초상화의 걸작을 만들었다. 이 걸작 옆에 루벤스가 17세기 유럽에 온 도포 입은 조선인의 모습을 그렸다고 전해지는 <한국인 초상>(왼쪽 아래)이 함께 있다. 볼과 콧등, 입술에 붉은빛을 넣으며 입체감을 부각시킨 이 그림은 서직수 초상과 달리, 이국 풍모의 동양인에 대한 거장 루벤스의 호기심을 읽게 해준다.
전시는 루벤스 그림처럼 중반 이후 곳곳에 서양 영향을 받은 근대기 한국 화가들의 초상화를 섞어 놓았다. 전통 붓과 팔레트를 같이 들고 두루마기 차림으로 노려보는 월북작가 이쾌대의 해방공간 자화상, 월북한 유학파 작가 배준성이 20세기 초 서양의 집단초상화풍으로 그린 <가족도> 등이 전통 그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사진을 베낀 탓에 인물의 기백은 빠져버린 듯한 김은호의 20세기 초 고종과 왕족들의 초상화와 더불어, 이런 작품 배치는 인문정신이 실종된 전통 초상화의 쇠락을 보여준다.
르네상스를 명명한 19세기 문명사가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는 정신의 연속체”라고 말했다. ‘초상화의 비밀’전 또한 역사를 일군 옛사람들의 축적된 정신세계를 엄청난 작품 수량과 설명들로 드러내려 한다. 중국·일본의 권력자 초상화나 집단 초상들을 비교해가며 동아시아 3국 초상화 전통의 차이를 설명하며, 화폭 뒤에 칠해 은은한 색감을 드러내는 전통 초상화 특유의 배채법을 실물로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 우리와 달랐던 선조들 얼굴 이면에 깃든 그 시대 정신의 지도를 낯설게 살펴보라고 전시장의 작품들은 채근한다. 11월6일까지. 입장료 5000원. (02)2077-90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루벤스가 17세기 유럽에 온 도포 입은 조선인의 모습을 그렸다고 전해지는 <한국인 초상>
18세기 최고 화원 이명기, 김홍도가 합작한 <서직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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