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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만들어진 신화’ 겨눈 날선 창끝

등록 2012-01-24 21:02

리뷰 연극 ‘풍찬노숙’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으로 이뤄진 국가다. 아니,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수백, 수천 년, 그보다 더 먼 과거에 누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지금 여기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써 놓은 역사를 사실로 믿으면서 ‘우리’의 뿌리를 상상하고 만들어갈 뿐이다. 지난 18일부터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중인 연극 <풍찬노숙>은 피부색이 ‘검붉은 순대빛’인 혼혈족들을 소재 삼아 피부색의 신화를 포함한 ‘만들어진 신화’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연극의 큰 줄거리는 시간이 불분명한 한반도 어느 시골에서 핍박받으며 살아가던 혼혈족들이 봉기를 일으킨다는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는 간단치 않다. 연극 속 시대는 현대-근대-중세-고대 순서로 거꾸로 간다. 근대가 채 끝나지 않은, 중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한 토막이다. 대전제인 ‘역방향의 시대’를 완전히 흡수하기도 만만치가 않은데 대사들도 묵직하다.

명석하지만 심약한 ‘응보’를 부추겨 ‘왕’으로 추대하려는 ‘문계’는 이런 대사들을 길게 읊는다. “우리가 부당한 취급을 받는 이유는 뭔가? 역사가 없기 때문이지.” “우리의 민중봉기가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시민의 주체적 경험이라고 부를 만한 근대성이 없기 때문이지. 근대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왕이 필요해.”

문계의 계산에 따르면, 후대가 기억할 수 있는 그들 고유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선 ‘왕’을 만드는 동시에 왕을 포함한 모든 혁명가가 비장하게 죽어야만 한다. 결국 ‘비범한 영웅을 중심으로 한 무리가 있었다’는 역사의 한 줄은 힘겹게 완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가상의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허무맹랑한 소동 같다. 하지만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여러 상식과 사실들을 한번쯤 의심해보자는 메시지를 이 연극은 지금, 우리에게 날카롭게 던져준다.

공연은 약 4시간. 보통 연극 두 편을 이어 붙인 길이다. 5분 넘게 긴 독백이 이어지는 몇 장면은 다소 늘어지는 느낌도 주지만 대체로 완급이 잘 조절돼 관람이 힘들 정도는 아니다. 무대와 객석이 뒤바뀌어 관객은 원형 극장 안에서 원래 무대가 있던 자리와 측면 객석에 앉게 된다. 원래 객석을 비우고 새로 깐 비탈길에 비료포대를 타고 내려가거나, 빠른 걸음으로 내달리는 배우들의 모습은 관객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한다. 2008년 4시간30분짜리 연극 <원전유서>로 파문을 일으켰던 김지훈 작가와 사회성 강한 연극을 만들어온 김재엽 연출가가 손잡은 문제작이다. 다음달 12일까지. (02)758-2150.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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